예전에 전파견문록이라는 예능 프로그램 중 '퀴즈! 순수의 시대'라는 코너가 기억난다. 어린이들이 특정 단어를 보고 자신의 생각을 힌트로 제시하면 어른들이 맞추는 형식이다. 어른들의 고리타분한 생각으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기발하고 순수한 아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해당 코너에서 나왔던 문제 몇 가지를 가져와봤다. > 옆을 마우스로 드래그하면 정답이 보인다. 아이들의 생각은 항상 무릎을 치게 만든다. 반대로 나에게 힌트를 내라고 한다면 저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평범한 어른의 평범한 힌트를 내겠지
Q1. 아빠가 일어나면 엄마가 책을 봐요 > 노래방
Q2. 엄마랑 목욕하면 이걸 꼭 해야 돼요 > 만세
나 역시 어릴 때는 아이들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만 경험의 폭과 생각의 키가 높아지며 아이들과 마음의 눈높이가 달라져 순수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일 뿐. 하지만 아이와 어른이 다른 게 비단 마음의 눈높이뿐이랴..
퇴근 후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잠시 집 근처 마트에 들렀다. 과일, 고기, 음료 등을 둘러보고 장바구니에 몇 개를 채워 넣고 계산대로 향한다. 1번부터 10번까지 계산대 중 가장 줄이 짧은 5번 계산대로 걸어가 앞사람이 결제를 마치길 기다리고 있는데 내 뒤로 아이 둘을 데리고 온 어머님이 줄을 선다.
피곤한 탓에 빨리 계산을 마치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앞에 계신 분 카드에 문제가 생겼는데 쉬이 결제를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잠시 시선을 뒤로 돌렸는데 꼬마 남매가 서로 장난을 치며 웃는 모습에 결제 지연으로 인한 짜증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꼬마 중 하나가 엄마 옷자락을 손으로 잡아끌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저기 거미줄이 있어
거미줄? 위생에 신경을 써야 할 마트에, 특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계산대에 거미줄이 있을 리가?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내 눈에 거미줄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단순히 엄마의 관심을 끌려고 한 말이었을까? 뭐지.. 하면서 꼬마를 바라본 순간 아이의 시선은 정면이 아닌 천장 쪽에 닿아 있었다.
키가 낮은 아이는 나와는 달리 계산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높이 들어 야 했던 것이다. 천장 쪽을 향한 아이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니 정말로 그곳엔 보일 듯 말듯한 거미줄이 보였다.
와
정말, 정말로, 진짜 별생각 없이 지나칠 수 있었던 아이의 말이었는데 순간 '아이들의 시선은 어른과 다르구나. 보이는 세계가 다르니 어른과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산대는 철저히 어른들의 시선에 키에 맞춰져 있다. 아이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높고 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찌 계산대뿐이랴.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에게 맞춰져 있다. 우리는 아이에서 어른이 되며 차츰 그런 환경에 익숙해진다. 모든 것이 내 시선에 맞춰진 환경.
비슷한 경험을 언젠가 서울에서 개최된 작은 페스티벌에서 겪은 적이 있다. 좁은 공간이 사람들로 북적이긴 했지만 맛있는 음식도 팔고 거리 공연도 열리고 전체적으로 쿵짝쿵짝 신나는 분위기였다. 모인 사람들 중에는 아이를 데려온 부모들도 보인다.
육아에 지친 그들도 즐길 권리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옆에 있는 아이는 신이 난 부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재미없다며 집에 가자고 졸라댄다. 부모는 이렇게 맛있는 게 많고 신나는 음악도 들리고 즐기는 사람도 많은데 왜 지루해하냐며 아이를 설득한다.
아이는 왜 지루해한 걸까?
어른의 눈높이에서 보면 행사장은 분명 맛있는 음식도 많고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이고 시끌벅적하니 즐겁고 신나는 공간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시선에서 보면 뭐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고 어른들이 다리로만 가득 찬 지루한 곳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에게 집에 가자고 졸라댄 것 아닐까? 나 같아도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이 저 모양? 이면 집에 가자고 졸랐겠다.
현명한 부모라면, 혹은 체력이 좋은 부모라면 아이의 시선을 어른에 맞춰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도 조금은 덜 지루하지 않았을까
아이들은 어른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니, 볼 수밖에 없다. 동심을 잃지 않는다는 건,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마음, 혹은 배려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