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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iny Nov 23. 2019

신비로운 겨울 제주산행

한라산 영실코스 오르기


신비의 섬 제주. 우리나라에 '제주도마저 없었다면 도대체 어딜 가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산섬 특유의 이국적이고 독특한 풍경 덕에 사시사철 국내외 여행객이 끊이지 않는 매력적인 곳이다. 다만, 근래 들어 거대 자본이 섬 여기저기를 들쑤셔서 예전의 매력을 조금씩 잃고 있는 안타까운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의 상징'하면 뭐가 떠오를까? 돌 하르방? 귤? 바다? 바람? 이것저것 많겠지만 아무래도 제주도 생성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한라산이 제일 아닐까? 제주도 어디에 있건 섬의 한가운데서 모든 곳을 보살피듯 내려다보는 한라산이야 말로 제주도의 어머니 같은 존재다.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고 등산을 즐기진 않지만 한라산은 꼭 한 번 정상에 가보고 싶었다. 다만, 몇 번을 제주에 가도 쉽게 도전하기 어려웠다. 우선 정상을 찍고 오기엔 입산부터 하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대략 왕복 8~9시간) 체력 소비도 커서 하루 정도는 꼬박 한라산 등산에 써야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작년 겨울, 한라산 등반에 도전하였다. 이유는? 별 거 없었다. 워낙 제주도에 자주 가다 보니 더 이상 새로 볼 곳이 없어지고 한라산이라도 가볼까? 하는 이상한 여유에서 비롯된 시작이었다. 


한라산은 그 규모가 거대한 만큼 정상까지 접근하는 경로도 다양했다. 각 코스는 시간과 난이도가 상이하여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내 경우 정상까지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고 장비도 변변찮은 등산화에 청바지 정도여서 그나마 쉽다는 영실코스를 선택했다. 



영실코스는 정상까지 연결되지는 않는다. 남벽 분기점에서 백록담의 남벽을 보고 돌아오는 코스로 왕복 5시간 정도 소요된다. 한라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따르면 영실코스의 탐방로 등급은 대부분 C이다. 등산 초중반에 등장하는 급격한 경사의 계단만 극복하면 대부분 평탄한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탐방로 등급 (난이도 - A: 어려움, B:보통, C:쉬움)

영실휴게소 -C- 영실계곡 -A- 병풍바위 정상 -C- 윗세오름 대피소 -C- 남벽분기점



영실 탐방로는 영실 관리사무소(해발 1,000m)나 영실휴게소(해발 1,280m)까지 차를 타고 와서 주차한 뒤 이곳에서부터 등산을 시작하면 된다. 다만 입산 통제시간이 있고 이른 아침에 와야 왕복할 수 있기 때문에 아침부터 주차장은 만차가 되기 십상이다. 때문에 택시를 이용해서 도착하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영실코스의 입구는 꽤나 가볍게 시작한다. 나무데크로 잘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육지에서 볼 수 없는 식생에 둘러싸여 신비로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과장 조금 보태면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풍경이랄까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난이도 A짜리 영실계곡 코스가 등장하면 주변을 살필 여유 따위는 금세 사라진다. 사진만 보는데도 숨이 가빠온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저 때의 악몽




계곡을 빠져나오면 한라산 비탈길을 따라 경사 가파른 계단을 계속 오른다. 이때 뒤로 보이는 한라산과 제주 시내 그리고 바다의 풍경이 꽤나 아름답다. 또한 한라산 방향으로 보이는 영실기암과 병풍바위는 그야말로 압권. 한겨울이 아닌 여름에 왔다면 좀 더 푸릇하고 풍성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육지에 설악산 울산바위가 있다면 제주엔 한라산 병풍바위가 있다. 실제로 눈으로 보면 거대한 절벽이 눈 앞을 콱!! 하고 가로막힌 듯한 압도감을 준다. 등산로는 나무 계단으로 잘 만들어졌으며 혹시라도 모를 등산로 이탈을 막기 위해 난간이 꽤나 높게 설치되어 있다. 



해발 1,500미터에서 볼 수 있는 식생. 지상에서 보이는 풍경과 사뭇 다르다. 나뭇가지가 어쩜 저렇게 사춘기 청소년 마냥 제멋대로 지맘대로 사방팔방 뻗치며 자랄 수 있는 걸까



놀라운 풍경은 사춘기 나무를 지나고도 계속된다. 이번에는 현무암 돌무더기 밭을 지난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옮겨놓은 것 마냥 여기저기 널브러진 돌덩어리들. 신기하다. 용암이 분출하면서 이렇게 흩어진 걸까? 하지만 더욱 놀라운 순간은 바로 이다음에 펼쳐진다. 



돌무더기 밭을 지나면 갑자기 넓은 평지가 나온다. 해발 1,900미터짜리 산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끝 간 데 없이 계속 오르고 또 오를 것이란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다. 여기까지 오는데 도대체 주변 풍경이 몇 번이나 바뀐 거지?


영실휴게소 입구의 그 습습한 풍경과 삭막하고 가파른 계단의 영실계곡, 웅장하고 장엄한 병풍바위와 영실기암, 현무 담 돌밭에서 이제는 너른 평지까지. 변화무쌍한 제주의 기후만큼이나 한라산의 풍경 또한 다이내믹하다.



조금만 더 힘을 내어 걸어가니 윗세오름 대피소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여러 사람들이 계단에 걸터앉아 가출한 영혼을 되찾고 있었다. 여기서 한 번 더 힘을 내면 남벽 분기 소까지 갈 수 있었지만 이때는 이미 남벽 분기 소로 가는 등산로가 폐쇄된 상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지정된 시각에 못 오면 남벽 분기 소에 갔다가 돌아올 때 날이 어두워져 등산객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평소 같았으면 남벽 분기 소에 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을 텐데 이땐 아쉬울 여지가 없었다. 이미 너무 힘든 상태여서. 억지로 내 의지를 꺾어준 입산통제에 감사하며 발길을 돌린다. 



올라올 때 힘들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풍경들을 내려가면서 여유와 함께 눈에 담아본다. 영실코스가 그리 어렵진 않다지만 물리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영실계곡의 가파른 계단에서 체력소모가 심하다 보니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오면 주변 풍경을 살필 여유가 줄어든다. 



올라올 때 보지 못했던 눈사람, 내려가며 보았네. 누굴까. 이렇게 센스 있는 눈사람을 만든 사람이. 눈사람 머리 위에 씌워둔 낙엽 모자도 너무나 인상적이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잠시 걸음을 멈춰 눈사람을 사진에 담는다. 



현무암 돌무더기 밭을 지나 다시 병풍바위와 영실기암 쪽으로 온다. 삐죽삐죽 사춘기 나무도 다시 보이고 내려오는 길 정면으로는 아까 보았던 제주시내와 바다가 멀리 보인다. 날씨가 더 좋았더라면..



산은 올라갈 때 보다 내려갈 때 더 주의하라고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칫하면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 저승길 익스프레스 열차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급할 건 없고 풍경은 멋지고.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자. 



다시 영실 휴게소 쪽으로 내려오니 숲에 옅은 안개가 껴있었다. 비록 영실코스의 끝까지 다녀오진 못했지만 겨울 제주 한라산의 신비로움을 가볍고 짧은 시간에 만끽하기엔 충분했던 시간이었다. 만약 다시금 체력과 시간이 허락해준다면 한라산 정상에 도전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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