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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iny Nov 24. 2019

사서 고생, 크로스핏 입문기(3)

사람은 항상 겸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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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회원님 죽어요


살면서 몇 번은 죽음의 위기를 넘긴 적이 있었지만 운동을 하다가 죽을뻔한 적은 없다. PT를 받았을 때도 죽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토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어도. 그런데 크로스핏은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겨우? PT 20번 한 경험을 무기로 양쪽에 무거운 두께의 원판을 팡팡팡 꽂아댔다.


참 신기한 일이다. PT를 할 때는 조금이라도 무게를 낮춰보려고 트레이너와 옥신각신 다퉜는데 크로스핏은 오히려 조금이라도 무게를 높여보려고 트레이너와 다투다니. 어찌 보면 이것이 PT와 크로스핏의 결정적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PT는 트레이너와 1:1로 운동을 하기 때문에 중량을 높이는 것에 따른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위험해 보인다 싶으면 언제든 트레이너가 잡아줄 수 있으니. 또한 자세도 옆에서 계속 봐주니까 무게를 올리는 것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다 보니 PT 트레이너는 옆에서 계속 '더더더더더더더더더' 빌런이 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크로스핏 트레이너는 무게 올리는 걸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한 번에 십 수 명의 회원을 대하다 보니 한 명 한 명 일일이 옆에서 자세를 봐줄 수도 없고 위험한 순간이 발생했을 경우 대처도 늦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무게 올리는 것에 인색하고 상당히 보수적이다. (사실 이렇게 하는 게 맞다)


그래서일까 트레이너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가 꽂아둔 두꺼운 원판을 턱턱 턱 하고 다 빼버린다. 내 자존심도 함께 빠진 느낌. 그러더니 45파운드짜리 빨간 테두리 바벨을 제자리에 두고 그보다 가벼운 35파운드짜리 노란 바벨을 갖고 온다. 주변을 둘러보니 남자 회원들은 전부 빨간 테두리의 무거운 바벨을, 여자 회원들은 노란 테두리 바벨을 쓰고 있었다.


아.. 자존심 상해


운동을 처음 배우는 입장에서 정말 쓸데없는 게 바로 이 자존심인데, 혼자 운동하는 것이 다니라 단체로 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을 살피게 된다. 게다가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얇은 두께의 원판을(5파운드로 기억) 바벨 양쪽에 가볍게 꽂아준다. '이거로 하세요' 무심하게 툭 던지고 뒤도 안 돌아보고 야속하게 떠나간다.


바벨 양 옆에 꽂아진 원판의 두께는 생활 체육인의 자존심 두께와 일맥상통한다. 지금 내 자존심은 체육관에서 가장 얇아진 상태였다.


내가 기대한 나의 한계(좌) 이미지와 현실이 허락한 한계(우)


EMOM_14 MIN 5 Deadlift +5 Toes to bar

EMOM_5 MIN 45 Sec Plank - 15 Sec rest


입술이 잔뜩 나온 채 첫 번째 EMOM 카운트를 기다렸다. 10..9...8..7.. 박스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돌았다. 크로스핏이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 단체로 하며 어느 정도 기록 경쟁의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저마다 무게는 다르지만 누가 더 많이 혹은 더 빨리 마치는지 보이지 않는 경쟁심리가 박스 전체에 가득 차 있다.


이 경쟁심리가 크로스핏의 KSF인데, 혼자 하면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운동 욕구와 강도를 상호 경쟁심리를 통해 단단히 조여놓는다. 단점은 이 와중에 무리하게 운동해서 다치거나 자세가 무너진다는 것. 양 날의 검이다 사실.


어쨌든 박스 전체에 흐르는 긴장감과는 달리 나는 가벼운 무게의 바벨을 보며 별 긴장도 하지 않고 '쳇 이쯤이야'라고 생각했다. 헬스장 다닐 땐 더 무거운 무게도 데드리프트로 들어봤는걸.


박스 한쪽 벽에 달린 디지털시계에 숫자가 14:00이 들어오자 묘한 긴장감으로 조용했던 박스가 온통 으쌰 으쌰 헉헉 쿵쿵 운동하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들로 시끄러워진다.


이게 바로 toes to bar 동작입니다. 잔인하죠..


이에 질세라 나도 바벨을 들어 올린다. 생각했던 것처럼 가볍다. 으쌰 으쌰 쉽게 데드리프트 5번을 마무리하고 Toes to Bar를 한다. 익숙하지 않던 동작이라 발 끝을 바에 대진 못하고 무릎을 살짝 굽히는 정도로만 했는데 생각보다 팔에 힘이 간다.


처음 몇 라운드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런데 라운드가 회를 거듭할수록 데드리프트뿐 아니라 토투 바를 하며 쌓인 팔과 다리의 피로가 바벨을 점점 무겁게 만든다.


디지털시계에 있는 숫자가 7분을 가리킬 때쯤 양손의 힘은 이미 빠질대로 빠졌고 가볍게만 느껴졌던 바벨은 마치 양쪽에 성인 남자 두 명이 매달린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이거 뭐지 아직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무거워진 거야!!'


헬스를 성실하게 하지 않은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내 기억은 한창 힘들게 PT를 받았던 때에 머물러있던 것이 가장 큰 착각의 요인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10분을 넘기고 나는 근육이 아닌 정신력으로 버티고 이악 물고 와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나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 나간 것 마냥 으악 헉헉 으아아아아아아아ㅏㅇ 소리를 내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바벨을 들고 BAR에 매달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나만 죽어가는 게 힘든 게 아니었구나. 그리고 내가 이렇게 힘들고 가벼운 바벨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도 볼 여유가 없구나.


사실 크로스핏을 처음 하면 남들이 어떻게 운동하는지 제대로 볼 여유가 없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하니까. 운동이 조금씩 늘면서 시야가 넓어지는 게 마치 운전 초보 시절 앞만 보면서 운전하다가 능숙해지면 시야가 넓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아무튼 지옥 같던 14분이 흐르고 트레이너가 그다음 와드를 하기 전 쉬는 시간을 준다. 나는 남들 눈치고 뭐고 그 자리에 쓰러져 거친 숨을 내쉬고 아픈 팔다리를 주물러댔다.


이때 나는 겸손을 배웠다


절대 나대지 말자. 절대 우쭐하지 말자. 절대 무리하지 말자. 나는 초보다. 내게 자손심이란 없다. 남들의 시선 따위 내가 죽어가는데 절대 중요하지 않다. 절대 트레이너의 무게 세팅에 토를 달지 말자. (맘 속으로라도)


그 이후 나는 자랑스럽게 노란색 바벨을 꺼내 들었고, 무게도 무리하지 않고 얇은 것부터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행여라도 나의 과한 욕심이 다시 발휘되어 두꺼운 원판을 팡팡 꽂을 때 트레이너가 와서 가볍게 지적하면 왕명을 받들 듯 씩씩하게 원판을 빼버렸다.


두 번째 와드는 간단해 보였지만 어려운? 플랭크였다. 첫 1분은 버틸만했다. 뭐야 쉽잖아? 할 만하잖아? 그런데 그다음 1분을 시작할 자세를 잡는데 트레이너가 오더니 자세를 고쳐준다. 'OO님 상체를 조금 드시고 팔은 이 위치에 두세요' 그러가 갑자기 멀쩡했던 내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어억'


바른 자세로 하니 확실히 코어에 힘이 들어가고 뭔가 무지막지하게 난이도가 올라갔다. 이렇게 트레이너가 돌아다니면서 회원들의 자세를 시시각각 바로 잡아준다. 운동을 오래 했건 아니건 자세가 틀렸다 싶으면 친절하게 때로는 따끔하게 설명해준다.


바른 자세로 버티는 45초 플랭크도 심각한 고역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들었고 도대체 내 돈 주고 왜 내가 이렇게 셀프 고문을 해야 하는지 운동이 뭔지 건강이 뭔지 다 집어치우고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지옥 같던 5분이 지나고 모든 와드가 끝이 났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사람들 속에 나도 함께 파묻혀 있었다. 샤워실로 향한다. 예전에 PT를 받을 땐 샤워도 대충 했다. 땀을 그리 많이 흘리지 않아서 어떤 날엔 씻지 않고 집에 가서 제대로 씻곤 했다.


그런데 크로스핏은 하고 나면 온 몸에서 비 오듯 땀이 난다. 씻지 않고 대충 땀을 닦고 옷을 입는 게 찜찜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래서 크로스핏 운동을 마치고 나면 전신을 박박 잘 닦는다. 근데 첫 체험을 마치고 세수를 하기 위해 손을 올리는데 손이 올라가질 않았다. 푸학 ㅋㅋ


올라가지 않는 팔을 억지로 올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온 몸을 씻고 나와 몸을 말리고 옷을 입는데 이번엔 다리가 제대로 굽혀지지 않아 바지를 못 입을 뻔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 옷을 입은 같은 사람인데 나갈 땐 옷만 같은 걸 입고 있을 뿐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만신창이에 녹초에 인간 종이조각이 되어 팔랑거리며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나를 보던 트레이너는 '어때요 괜찮아요? 할 만해요?'라고 말을 건넸지만 그때의 눈빛은 과장 좀 보태면 딱 이거였다.


넌 얼마나 오래 할지 보자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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