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대륙 끝에 톡 튀어나온 반도에 살고는 있지만 국토의 양 옆과 아래는 바다요, 위로는 갈 수 없는 땅이니 섬에 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덕분에 이 땅에서 나고 자란 나는 비행기가 아닌 바퀴 달린 것을 타고 국경을 넘나드건 상상할 수 없었으며 영토가 그리 크지 않기에 침대칸이 구비된 기차여행 또한 그랬다.
그래서였을까, 유럽여행에서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 달려 잠든 사이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사실 간절히 원하지 않아도 숙박비와 교통비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기에 가난한 대학생에겐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무적의 유레일패스 소지자도 유럽여행 시 몇몇 구간은 예약이 필수였다. 야간열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열차 예약은 독일 철도청 사이트에서 해결했다. 시간 잘 지키는 나라로 유명한 만큼 온갖 정보가 정확할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A에서 B로 이동하는 단순한 경로에도 열차의 종류는 꽤 많았다. 몇 시에 출발하는지 중간에 어느 도시를 들르는지, 총 운행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본인의 여행 일정에 맞는 세심한 선택이 필요하다.
나는 오스트리아 빈 서역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로 갈 때 처음으로 야간열차를 이용했다. 비행기로는 겨우 한 시간 반 정도 되는 거리지만, 야간열차를 이용할 경우 대략 1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대략 밤 9시에 출발해서 아침 8시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비용은 겨우? 38유로였다. 이 정도면 현재 환율 기준으로 대략 5만 원이다. 5만 원에 하루 숙박과 국경을 넘는 교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쿠셋의 전체적인 모습은 아쉽게도 담지 못했다
빈 서역에서 밤 8시 20분에 미리 정차해 있는 베네치아행 야간열차에 올라탔다. 한국에서 열차를 예약할 때 별 다른 고민 없이 쿠셋으로 예약했는데 일반 좌석이나 컴파트먼트는 불편하기도 하고 짐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힘들 것 같아서였다. 결과적으로, 꽤 괜찮은 결정이 된다.
열차 안에는 탑승객이 별로 없었다. 지정된 방에 들어가니 6인실 쿠셋이었고, 1층과 2층 침대는 좌석 조정이 가능해서 상황에 맞게 3층 침대 두 개와 1층, 2층 침대를 합쳐 좌석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이윽고 출발 시간이 다가왔고, 몇 분 뒤 내가 있던 쿠셋 에도 누군가 들어온다. 원피스 루피처럼 밀짚모자를 멋스럽게 눌러쓰고 경쾌한 몸놀림으로 미리 앉아있던 나를 보고 간단히 인사한다. "Hi my name is Ryan" 중학교 2학년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인사말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 뉴올리언스 루이지애나에서 왔고 부동산 일을 3년 정도 하다가 다 때려치우고 그간 모은 돈으로 3개월 간 유럽 여행을 왔다고 한다. 이미 2개월 간 돌아다녔다고.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혼자 오랜 기간 타지 여행을 다니면 불쑥 외로움이 찾아온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외로움에 더욱 푹 젖기도 하고 누군가는 외로움이 스며들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낯선 이를 찾아다닌다.
라이언은 후자를 택했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기가 무척 힘겨웠지만 (언어 마저 달랐기 때문에 더더욱) 나중에는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일행이 보이면 찾아가 함께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행에서 만난 인연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며 함께 있는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다고 한다. 다 그런 거 아니겠냐며 세상 다 산듯한 너털웃음을 뱉는다.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었지만 밤 8시의 피곤함은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는 힘을 뺏아갔고 (사실 내 영어가 그리 유창하지 않기에 조금 더 복잡한 대화는 힘들었다) 이내 둘은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라이언은 노트북을 켜고 미드를 보기 시작했고 나는 어두운 차창 밖을 보며 남은 여행 일정에 대해 생각했다.
몇 시간이 지난 뒤 어딘가의 역에서 또다시 손님이 합류했다. 이번에는 텍사스에서 온 애나였다. 대학교 졸업을 기념해서 유럽여행을 왔다고 한다. 덕분에 나와 라이언은 둘이 나눈 자기소개를 다시 반복해야 했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쿠셋을 예약했는데 무슨 착오가 생겼는지 한 방에 세 명이 모인 게 아니라 각자 방마다 한 명씩 예약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셋이 같이 있는 게 좋지 않겠냐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겨우 하룻밤 야간열차에서 떨어져 있는 건데 덕분에 낯선 이를 만날 기회도 있고 좋을 것 같다고 희망 회로를 돌렸다고 한다.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경우 다 스스로와 대화할 수 있고 낯선 이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그도 나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다. 새로운 인연을 만날 기회가 많지만 함께 다니는 경우 서로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함께 있기 때문에 낯선 인연을 마주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그녀들은 우연한 기회를 잘 활용하기로 했나 보다.
라이언은 먼 타지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서 왠지 더 반가운 눈치였다.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동양인과 대화하느라 신경 썼던 걸 버려두고 애나와 맘껏 대화하기 시작한다. 발화량이 터졌다. 둘의 대화가 너무 빨라서 따라가려 노력하다 뒤쳐져 이내 귀를 닫고 딴생각에 집중한다.
재미있는 경험이다. 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보니 피할 공간이 없다. 게스트 하우스였으면 널찍한 공간에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을 텐데 이 곳은 서로의 영역에 너무도 쉽게 침범할 수 있었다. 덕분에 서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빈 서역을 출발한 지 3시간 정도 되었을 때 마지막 손님이 합류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부부였다. 나와 라이언 그리고 애나는 또다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한다. 하지만 그 전과는 달리 자정을 향해가는 터라 서로 간단한 대화만 나누고 잠에 든다.
나는 3층에서 잤는데 다리를 뻗기에도 불편했고 난간 같은 것도 없어서 열차가 급정거하거나 급출발할 때마다 높은 곳에서 기겁을 했다. '이렇게 유럽 한복판 기차 안에서 떨어져 죽는구나..' 하지만 생각보다? 몸뚱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건 쉽지 않았다.
밤새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몸뚱이 대신 내 영혼이 객실 안을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사이 열차는 무사히?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했다.
아침에 쿠셋 구석에 찌그러진 멘털을 챙겨 일어나니 간단한 조식을 준다. 주먹 크기의 바게트 빵과 딸기잼과 버터. 그리고 정체불명의 커피. 빵은 그나마 먹을만했지만 잼과 버터는 멘털만 챙겼지 입맛은 여전히 쿠셋 어딘가 버려진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맛이 없었다.
내 입맛 어디 갔지.. 찾는 사이 라이언이 'We're here, good luck' 이란 쿨한 말을 남기고 떠난다. 잼과 버터에 혼란스러웠던 정신과 짐을 챙기고 3층 꼭대기에서 1층으로 내려온다. 뿌직.. 아.. 라이언이 두고 간 것은 good luck뿐이 아니었다. 크림을 밟아 뭉개는데 성공.. 액땜이라 생각했다.
남는 건 시간과 체력뿐이라는 생각에 '비행기를 탑승했을 때 아낄 수 있었던 8시간은 버렸지만 비행기와 호텔 예약비는 절약했다'는 정신승리와 함께 일어났지만 개운한 아침을 맞을 체력이 사라지고 없었다! 밤새 3층 꼭대기에서 흔들리며 영혼과 몸뚱이가 모두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산타루치아 역 내부에는 4유로짜리 짐 보관소가 있다. 배낭을 맡기고 본격적으로 8시간의 베네치아 자유여행을 시작했다. 불편했던 야간열차의 첫 기억은 '돈으로 시간과 체력을 사자'라는 진한 교훈을 남겼다.
두 번째 야간열차 구간은 나의 여행 역사상 역대급 난이도를 자랑했다.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프랑스 니스로 가는 구간인데 총 여정은 "인터라켄 동역 (Interaken Ost) > 바젤 (Basel SBB) > 뮬루즈 (Mulhouse Ville) > 니스 (Nice ville)"이었다. 비용은? 28유로였다.
40일간의 유럽여행 중 지난 20여 일 간 별 탈 없이 순조로운 여행이었으나 마냥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바로 이 구간 때문인데, 예약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내가 원하는 일정과 동선, 그리고 열차 시각 등이 맞지 않아서 전체적인 여행 경로가 틀어지기 까지 했으니.
게다가 바젤에서 뮐루즈에 도착할 때 열차를 바꿔 타야(?!) 했는데 환승 시간이 너무 짧아 행여나 연착이라도 되면 중간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게 뻔했다.
긴장된 마음에 열차에서 편히 쉬지도 못하다 스위스 바젤 중앙역에 도착해서 정신 바싹 차리고 프랑스 뮐루즈로 향하는 열차로 갈아탄다. 그제야 긴장이 풀려 뮐루즈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거의 졸도와 가깝게 잠에 빠져버린다.
뮐루즈에 도착하니 밤 9시 18분이었고 니스로 향하는 열차시각인 10시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서 역 근처를 돌아보기로 한다.
해 질 무렵 찾아간 프랑스 뮬루즈 중앙역. 저무는 하늘색과 건물 색의 조화가 오묘했다. 역사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을씨년스러웠다. 방금까지 있었던 스위스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 잘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또 국경을 넘어버린 거다.
10시가 되자 플랫폼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했다. 뮐루즈가 시작 역이 아니어서 그런지 열차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지정된 방에 들어가니 이미 두 명이 2층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3층 침대로(...)
이번 열차에는 3층에 난간 비스 무례한 것이 있어서 떨어질 위험은 좀 덜었다. 하지만 베니스 야간열차보다 더 비좁아서 너무 답답했다. 정말 잠만 자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번에도 야간열차 타면서 과자나 맛있게 먹으려고 이것저것 사 왔는데 이번에도 또 실패였다. 그래서 방에서 나와 객차 연결 부분 쪽으로 가서 과자나 우걱우걱 먹고 다시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자 역무원이 또 돌아다니면서 깨웠다. 지난번처럼 아침을 주지는 않는다. 야간열차는 이번이 두 번 째라 별 어려움 없이 하룻밤을 견디고 일어나 니스 빌 역 플랫폼에 내렸다. 아침 햇살이 기차역에 쏟아지듯 내려앉는다. 스위스와는 달리 따스한 햇살과 공기가 나를 반겼는데, 문제는 피곤하고 정신이 좀 없었다. 야간열차의 가장 큰 단점이 아닐까.
돈은 (좀) 있고 시간과 체력이 없다면 비행기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돈은 (좀) 없고 시간과 체력이 많다면 야간열차를 선택해서 나름의 낭만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