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iny Nov 26. 2015

멋지게 나이 드는 법

포르투갈 리스본  여자 도둑 시장의 노인들

낡고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


'어쩔 수 없이' 명목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때문에 오랫동안 곁에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쉬이 내치거나 버리기 힘들다는 것 자체가 그 사물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 아닐까


오래된 사물에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이 짙게 배어있다. 그리고 그 흔적 위엔 저마다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다. 하나하나 들춰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는 재미가 있다. 남들은 관심도 없는 오래된 가구의 작은 흠집과 낡은 손잡이를 보고 나는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다. 


아.. 여긴 내가 어릴 적에 넘어지면서 부딪힌 곳이지,
여긴 내가 8살 때 처음으로 손이 닿았었지


그런 연유로 나는 벼룩시장 구경을 굉장히 좋아한다. 남들이 보기엔 보잘 것 없는 물건들도 저마다의 추억과 이야기를 갖고 있다. 흐려진 유리병 위 스티커 자국, 닳고 닳은 노트의 찢어진 한 면, 안테나가 부러진 라디오.. 누군가의 추억과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보는 느낌이랄까



리스본엔 거대한 벼룩시장이 있다. 일명 '여자 도둑 시장'이라 불리는데, '여자'도둑 시장인 이유는 여자가 많아서 그런 건 아니고 Feira da ladra의 ladra가 여자를 의미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자'도둑'시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마치 도둑들이 파는 장물과도 같은 물건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리스본의 여자 도둑 시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빼고는 다 파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걸 팔아서 도대체 어쩌자는 거지? 혹은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별의별 물건들을 팔고 있다. 


하지만 리스본 여자 도둑 시장의 수많은 물건보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들 곁에 있었던 나이 든 어른들이었다. 벼룩시장에는 유난히 나이 든 어른들이 많다. 젊은이들은 그저 재미 삼아 물건을 팔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구경을 하지만 이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건들을 바라보거나 혹은 물건을 팔고 있다. 



남들이 보기엔 정말로  보잘것없어 보이고 이런 걸 팔아서 뭐하나 누구 하나 사가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이들에겐 그런 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 나와 가판을 차리고 본인이 갖고 있는 물건들을 매우 소중하게 진열하며, 동시에 물건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그러면서 동시대의 사람들과 추억을 공유하고, 뒷세대의 사람들에게 추억을 건넨다. 추억이 깃든 물건을 매개체로 누군가와 또 다른 연을 맺고 추억을 만드는 것이 진짜 목적이 아닐까



벼룩시장에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은 또 다른 이유는, 자신들의 전성기를 함께 보낸 반가운 물건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그때 그 시절 내가 즐겨 쓰던 즐겨 보던 물건들을 보고 반가워하며 열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여자 도둑 시장은 굉장히 커서 다 둘러보려면 족히 3시간은 넘게 필요하다. 나이 든 어른들은 곧잘 허리를 숙여 물건을 바라보다가도 이내 허리를 펴고 먼 곳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리곤 한다. 그래도 둘러보는 걸 멈추지 않는다. 간혹 자신들의 맘에 드는 것을 발견하면 수 분, 수 십 분이라도 그 자리에 서서 계속 만져보고 응시한다. 


여자 도둑 시장에는 쓰던 물건만 나오지는 않는다. 간혹 직접 만든 새물건을 팔러 나온 상인들도 있는데, 사진 속 할머니는 타일에 끌리신 모양이다. 몇 장 되지 않는 타일이지만 정말이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물건을 고르셨다. 품질에 대해선 써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시중에서 파는 물건들 보다 값이 확실히 싼 건 사실. 발품만 잘 팔면 정말 값진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간혹 집안의 살림살이를 긁어모아 작은 규모로 판을 벌린 분들도 계시는데 손님이 오지 않으면 곧잘 잠에 빠지곤 한다. 품목이 참으로 다양하다. 잡지도 있고 책도 있고 신문도 있고 모형 자동차에 비닐봉지 안 알 수 없는 물건까지. 누가 몰래 가져가도 모를 것 같은데, 결국 판매가 목적인 것 같지는 않기도..



여자 도둑 시장은 달리 보면 심리전의 전쟁터다. 흘끗거리며 살까 말까 고민하는 손님과 아닌 척 물끄러미 같은 곳을 바라보는 상인 간 치열한 싸움이 소리 없이 벌어지는 곳. 사진 속 아저씨는 한참을 저 자세로 판에 깔린 물건들을 살펴보았고, 옆에 앉은 상인은 그런 아저씨를 아무  말없이 계속 바라만 보았다. 아저씨는 몇 번을 살듯 말듯 떠날 듯 말듯 하다가 결국 상인에게 말을 걸었는데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해서 결국 이 싸움의 승자를 끝까지 구경하지는 못했다. 소리 없는 전쟁터


여자 도둑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팔고 사는 장소가 아니라  보면 동네 노인들의 친목 장소이기도 했다. 물건을 파는 건 그냥 소일거리나 구실에 불과했고 사실은 이웃 상인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시장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 속 아저씨는 아까부터 물건 파는 걸 포기했다. 자신이 진열한 물건을 뒤로 한 채 다른 쪽에 시선과 관심을 던진다. 


바로 이 장면


이번 여자 도둑 시장 구경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나는 이 뒷모습을 보며 과연 "어떻게 살아야 멋지게 나이들 수 있는가"를 잠시 생각했다. 자신과 함께 오랜 시간을 나눈 물건들에 둘러싸인 나이 든 어른의 뒷모습은 참으로 쓸쓸하면서도 외로워 보였다. 


멋지게 나이 든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어떻게 하면 멋지게 나이들 수 있을까.. 여느 오래된 물건의 작은 흠집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깃들고 그것이 그 물건의 전체적인 인상을 만들듯,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흠집에 우리의 인상이 결정되고 멋지게 보이거나 혹은 외롭고 쓸쓸해 보이지 않을까.. Vintage와 貧의 차이는 생각보다 적다..



안타깝게도 여자 도둑 시장에서 본 나이 든 어른들은 멋지게 나이 듦과는 조금 먼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부분의 재래시장에서 볼 수 있는 피곤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고, 삶에 찌든 흔적과 흠집들이 얼굴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모습들이었다. 홀로 있는 적적함을 애써 달래기 위해 이곳을 찾은 듯한 모습들..


피곤에 지쳐 눈동자에 힘이 없어져 버린 어느 한 상인. 여자 도둑 시장의 상인들은 대부분 이런 표정을 하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여자 도둑 시장의 그 어떤 물건도 구경꾼들의 간택을 쉬이 받지는 못한다. 장사가 목적이라면,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라면 다른 장소와 물품을 택했어야 했다. 여기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건을 사러 온 것이 아니라 구경하러 온 것이기 때문이다. 


벼룩시장의 출구 쪽에서 보게 된 어느 할머님은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무언가 잔뜩 위축되고 움츠린 자세에서 무언가 안쓰런 마음이 흘러내렸다. 부디 생계를 위한 활동이 아닌 취미와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여가이길 바랬다. 추억이 깃든 재미난 물건들을 보러 왔다가 나이 든 어른들을 보며 다른 생각을 안고 가게 되는 리스본의 여자 도둑 시장..



시장을 벗어나 트램 정류장으로 가면서 나는 멋지게 사는 삶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때마침 여자 도둑 시장을 보러 왔는지 트램에서 노년의 어느 한 부부가 내렸는데, 아래 위로 맞춰 입은듯한 옷과 함께 불편한 몸을 이끌면서도 양손을 꼬옥 마주 잡고 계신 것이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이 팔과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추억이 새겨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여러 추억과 이야기를 공유한 두 사람. 정말이지 아름답고 멋진 연인이 아닐 수 없다. 


멋지게 나이 든다면, 바로 저렇게..



즐겁게 읽으셨으면 좋아요 및 구독  부탁드립니다 : )


words by lainy


이전 15화 야간열차에서 만난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