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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iny Nov 10. 2019

예쁘거나 새롭거나 놀랍거나

무엇이 사람을 모으는가


몇 년 전 종영한 '응답하라 1988' 이란 드라마를 기억한다. 케이블 TV 드라마로서는 (최종화 기준) 역대 최고 시청률인 19.6%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달성했던 당시 최고의 화제작이다. 드라마의 인기 요인이야 워낙 많을 거다. 추억 보정, 배우들이 연기, 재미있는 스토리, 반전 등. 홈페이지에서는 이 드라마를 이렇게 설명했다. 

... 온 가족이 도란도란 모여 앉아 보던 ‘한 지붕 세 가족’ 앞집, 옆집, 뒷집 너나없이 나누고 살았던 골목 이웃들을 기억한다...

별 문제(?) 없는 평범한 설정인데 절대 평범하지 않은 것이 도사리고 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항상 들던 의문이었다. 여기에 살포시 풀어보자. 


왜 내 주변엔 저렇게 생긴 이웃이 없는 걸까?


골목 이름이 SM Town일 수도 있겠다. 영화나 드라마 속 평범한 이웃들은 절대 평범하지 않게 생겼다. 응답하라 1988 속 우리 이웃들도 포스터 속 모습은 조금 촌스러운 이웃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무려 30년 전임을 감안하여 꾸밈새와 옷차림새 등을 시대 보정한다면 얼굴에선 빛이 나고 있는 수준이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 흥행의 3요소로 배우(연기/외모력)와 연출, 그리고 시나리오를 꼽는다. 셋 중에 뭐가 제일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절대 진리의 영역이 아닌 개인 취향의 영역으로 갈 것이다. 누군가는 외모/연기력을 제일 중요하다 여길 것이고 누군가는 연출을, 또 다른 누군가는 탄탄한 시나리오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혹은 드라마와 맞닥뜨리는 순간 한눈에 관객 혹은 시청자를 사로잡는 건 단연 배우의 매력이다. (상대적으로 연출과 시나리오는 극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야 진가를 발휘한다)


영화든 드라마든 시나리오가 너무 비현실적인 경우 관객 혹은 시청자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얼굴엔 관대하다. 특히 주요 배역일 경우 그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잘생기거나 예쁘게 생겼어도 너그럽게 넘어가 준다. 흐뭇한 미소와 함께. 


잘생기거나 예쁜 '생김새'를 좋아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이런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 맛있는 음식이나 칭찬, 보상 등으로 기쁨과 만족감이 발생되는 뇌의 일부 영역이 활성화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 조차 미남/미인의 사진을 평범한 사람의 사진보다 더 오래 본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심미적 차원에서 보고 있으면 즐거워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얘기다. 


당장 길거리에 나가 흔히 볼 수 있는 외모의 배우가 주인공이 된다면 그 드라마나 영화는 흥행할 수 있을까? 배우의 매력으로 승부하지 못하는 경우 두 번째 수단은 영화 혹은 드라마의 연출이 된다. 감독 혹은 PD의 역량으로 외모나 연기력이 뛰어나지 않은 배우를 가려주고 엉성하거나 그다지 특출 나지 않은 시나리오도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다. 


만약 이마저도 어렵다면? 탄탄하거나 신선한 시나리오 만으로도 이목을 끌 수도 있다. 물론 배우의 외모도 안되고 연출도 엉망인데 시나리오만 탄탄하고 신선하다면 대중적 인기는 포기하고 마니아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숨겨진 명작 정도 되겠다. 


배우의 매력과 뛰어난 연출, 그리고 탄탄한 시나리오 세 가지를 모두 충족시킨다면 보나마다 대박 흥행의 길을 걸을 것이다. 하지만 셋 중 둘만 갖춰도 중박은 거둘 수 있다. 셋 중 하나만 충족시킨다면 미완의 걸작, 숨겨진 명작이 될 것이다. 셋 다 갖추지 못한다면 대중들에게 잊히는 건 고사하고 선택조차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여행지라면 어떨까?


흥행의 3요소를 여행지에 그대로 대입해보면 아마도 '배우 = 겉보기 매력' '연출 = 관광지를 잘 꾸며놓은 정도' ' 시나리오 = 관광지가 품고 있는 스토리텔링' 정도가 될 것이다. 여행지 혹은 관광지 역시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다면 24/365 관광객이 끊이지 않을 것이며 셋 다 없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될 것이다. 


셋을 모두 다 갖춘 여행지는 정말 많이 떠오른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프랑스의 에펠탑,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 등. 이 여행지는 멀리서, 한눈에 봐도 '저는 볼거립니다. 저는 관광지입니다. 저는 꼭 봐야 합니다. 어찌 저를 그냥 지나치시나요'를 외치는 듯 온몸으로 그 아우라를 뿜어낸다.


첫눈에 놀랄만치 거대하거나 아름다운 건 둘째치고 그 주변 관광 시설 및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으며.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으면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에펠탑은 멀리서 봐도 '어 저거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거대하다. (배우) 그리고 에펠탑 주변엔 공원이나 교통 등 에펠탑 관광 혹은 구경을 뒷받침하는 시설들이 잘 갖춰져 있다. 밤에 와도 멋진 모습을 계속 볼 수 있도록 잘 꾸며놓기까지 (연출) 게다가 처음 만들어졌을 땐 사람들에게 흉물이라는 구박을 받았지만 지금은 프랑스 최고의 건축물이 되었다는 희대의 반전 스토리(시나리오)까지 갖고 있다. 완벽하다. 



흥행요소 셋 중 두 가지만 갖춘 여행지는 무엇이 있을까? 주로 자연경관이 이에 속한다. 배우의 매력은 충분하지만 거기까지 접근하기가 어렵거나 그 안에 깃든 별 다른 이야기가 없다. (있어 봤자 예를 들면, 아이슬란드의 이 화산은 10억 년 전 분화하기 시작하여.. 정도의 내셔널 지오그래픽급 이야기뿐일 듯)


그렇다면 하나만 갖춘 것들엔 뭐가 있을까? 이런 경우 개취의 영역이나 마니아의 영역으로 흘러간다. 방문하는 모든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하고 누군가는 열광하고 누군가는 시시해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벨기에 브뤼셀, 오줌싸개 소년 동상이다. 



브뤼셀의 웅장한 시청광장을 보고 난 뒤 목격한 오줌싸개 소년은 막상 별 게? 없었다. 외관도 생각보다 너무 작고 볼품없었으며(배우), 여기에 오줌싸개 소년 동상이 있어요!라고 안내하는 별 다른 장치(연출)도 보이지 않았다. 음? 이게 다야? 이게 끝? 뭔가 오줌싸개 소년이 갑자기 12시가 되면 만세를 외치거나 그런 것도 없는 거야??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기 때문 아닐까? 이 작고 볼품없는 소년은 그 속에 재미난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 오줌싸개 소년은 1619년 제롬 듀케 뉴 아가 만든 청동상으로 그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14세기 프라방드 제후의 왕자가 오줌을 누어 적군을 모욕했다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다. 이런 작은 설화로 이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니. 스토리 텔링의 힘이며 여행은 준비한 만큼 보인다고 하나보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관광지는 상하이에도 하나 있다. 전통과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상하이는 화려한 볼거리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위 사진을 보면 그런 모습과는 정 반대로 그냥 평범하기 그지없는 누군가의 생가 정도로 보인다. 별 다른 표지판도 없어서 사전 정보가 없으면 시큰둥하게 지나가기 쉽다. 


사실, 별 다른 사전 정보가 없으면 이 곳을 지나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곳에 애써 정보 없이 자유 의지로 올 필요가 없으니까. 보다시피 아무 볼거리도 없다. 하지만 여기엔 엄청난 사연이 깃들여 있으니, 바로 이곳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청사 되겠다. 


나는 이곳을 방문하기 전까지 별 다른 사전 정보 없이 찾아갔는데 우리나라의 독립을 이끈 임시정부 청사라면 뭔가 엄청난 규모에 저택이며 관광지로 잘 개발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얼핏 보면 옛날 우리 집 대문이랑 별 다를 것도 없는 게 남의 나라 임시정부 청사라 이렇게 방치 수준으로 둔 건가 싶기도 하고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삿포로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다. 볼거리 즐길거리로 가득했던 삿포로에서 제일 당황했던 여행지였다. 드넓은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저 나무 한 그루가 여행지가 될 수 있다니. 풍경이 예쁜 것도 개인에 따라 심하게 갈릴 것 같고, 주변에 뭔가 관광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별 다른 스토리가 녹아들어 간 것도 아니다. 


다만, 눈이 오면 하얗게 뒤덮인 설원 위에 세모난 모양으로 홀로 우뚝 솟아오른 모습이 아름다워서 여행객들에게 '크리스마스트리'라 불리는 곳이다. 그래서 겨울 풍경은 위 사진보다 좀 더 예쁘긴 하다. 가끔 정말 문득 이따금 길을 가던 여행객들이 차를 세우고 나무와 함께 사진을 찍는다. 이 나무로 돈을 버는 것은 아니나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 떠오른다면 조금 심한 비유일까


여행지도 영화나 드라마와 같이 흥행요소 3개를 골고루 갖췄을 경우 높은 확률로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2개 혹은 1개만 갖췄을 경우 개인의 취향 혹은 마니아의 영역으로 향해간다. 누군가에겐 훌륭한 여행지가 되지만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다. (물론 3개를 다 갖춘 곳도 이렇게 될 수 있지만 그 확률이 지극히 낮겠지..)


그런데 뭐 남들 다 인정해도 내 눈에 들지 않는다면, 혹은 반대로 남들이 다 '이게 뭐야'라고 얘기해도 내 눈에만 멋지고 나에게만 의미 있다면 그곳이 남들 눈엔 얼마나 초라한지 여부와 상관없이 내게 최고의 여행지가 되면 되는 것 아닐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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