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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iny Oct 19. 2019

기억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베네치아에서 만난 인생 딸기는 정말 맛있었나

사람의 기억은 믿을게 못된다


일주일만 지나도 보고 듣고 느낀바의 대부분을 잊기 때문이다. 이것을 정말 방지할 수는 없고 꾸준히 되새김질하여 잊히는 속도를 조금 줄일 수 있을 뿐이다. 


기억의 조각이 사라진 빈 공간을 대신 채우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냥 빈 공간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기억이 들어올 수도 있고, 아니면 조작된 기억이 들어올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나 보다. 하지만 기록 역시 완벽할 수 없다. 보관 중 유실 또는 손실될 수 있거나 기록 자체가 잘못 적혔거나 그 내용이 바뀔 수 있다. 또는, 기록을 했다는 기억 자체를 잊을 수도 있다. 


나는 기억력이 무척 나쁘다. 공부는 어떻게 했으며 업무는 어떻게 하는지 스스로가 놀라우리만치 그렇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남의 얘길 듣는 순간 딴생각을 하는 등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중요하지 않다 여겨서 머리에서 자동 삭제를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머리가 나쁜 건지. 가끔은 메모를 했다는 것조차 잊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인생의 아주 중요했던 몇몇 변곡점들은 머릿속에서 잊히지도 않고 강렬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남아 있다. 다섯 살 때 베란다 밑으로 떨어진 경험, 초등학생 때 전교생 앞에서 발표하느라 무척 떨렸던 감정, 가고 싶었던 대학교 합격 연락을 받았던 인천의 어느 허름한 짜장면집 풍경 등.


물론, 어이없을 정도로 '이런 건 왜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거지?'라고 생각할 만한 것들도 있다. 어릴 때 내 방을 쓸던 빗자루, 초등학생 때 잘못 던져서 누나가 먹던 라면 그릇에 빠졌던 양말(이 정도면 남아 있을 만 한가..), 고등학생 때 한 번 쓰고 불편해서 버렸던 빗 등. 


여행에 한정 짓는다면, 아마도 베네치아에서 먹었던 딸기가 가장 적절한 예일 것이다. 



밤새 야간열차에 시달린 뒤 베네치아 역에 내려 피곤과 굶주림에 허우적거렸다. 4유로짜리 짐 보관소에 무거운 배낭을 맡기고 나서야 약 8시간의 베네치아 자유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중앙 역을 빠져나와 본, 베니스의 첫 느낌은 내 행색과 비슷했다. 하루정도 씻지 못해서 꼬질꼬질했던. 소매치기가 많다는 말에 긴장했지만 내 모습을 보고 다가올 소매치기는 없겠다는 생각에 이내 마음을 놓고 돌아다녔다. 


베네치아는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다. 영어로는 베니스, 독일어로는 베네디히라 부른다. 세계적 관광지이며 운하의 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베네치아만 안쪽의 석호 위에 흩어진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덕분에 베네치아의 매력 중 하나인 좁디좁은 골목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좁디좁은 골목 사이로 비치는 따스한 햇살을 따라가다 보니 리알토 다리에 도착한다.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S자의 대운하에는 3개의 다리가 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다리가 리알토 다리이다.


16세기까지 나무로 만들어졌었는데, 16세기 말 공모에서 안토니오 다 폰테의 설계가 채택되어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다리로 변신했다고 한다. 보기에도 뭔가 굉장히 두텁고 무거워 보인다. 실용성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모습이지만 디자인의 세계는 실용성을 배제하는 경우가 가끔 있으니.


'켠 김에 왕까지'라고, 베네치아의 깊은 곳까지 갈 생각은 없었지만 '이왕이면' 병에 걸린 채 마르코 광장까지 가볼까 해서 내달렸다. 가는 길이 워낙 복잡하고 미로 같았다. 유리공예로 유명한 도시답게 골목골목 이런 공예품들을 많이 마주할 수 있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도착한 마르코 광장은 여태껏 본 광장 중에 가장 사람이 많았고 북적거렸고 거대했고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겨우 3시간 정도 베니스를 돌아보고 베니스를 그저 덥고 눈부시고 지저분한 매력 없고 재미없는 도시로 파악하려 한 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는 거.


성 마르코 성당이 보인다. 유럽 여느 곳에서 보았던 성당과는 뭔가 많이 다르다. 각국의 문물이 왕래하는 베네치아의 특성상 이국적인 감성이 녹아 있는 건 당연할 터. 산 마르코 대성당은 대표적 비잔틴 양식의 건축물로, 베네치아 사람들이 성 마르코의 유해를 가져와서 성당을 짓고 여기에 안치했다고 한다. 베네치아에서 1박을 하지 않은 것을 이때 처음으로 후회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건 강렬한 햇살과 무더위였다. 정말 덥고 뜨거웠다. 마치 적도에 있는 모로코나 이집트(가 본 적은 없습니다만..)에 놀러 온 듯한 더위였다. 베네치아를 돌아다니는 내내 식수대만 보이면 굶주려 여물통에 달려드는 소처럼 눈이 뒤집혀 물을 마셔댔다. 


메마른 내 몸에 단비 같은 식수를 공급하고 한 숨을 돌린 뒤 마르코 광장을 떠나 다시 산타루치아 역으로 돌아간다. 여유가 생겨서인지 돌아갈 때는 베네치아를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러다 한순간 내 눈에 띈 건 과일 가판대였다.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던 그곳에는 새빨간 딸기들이 플라스틱 박스에 담긴 채 누군가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데려가~'



정신을 차린 순간 이미 플라스틱 박스는 내 왼손에 있었고,  오른손은 가게 주인에게 몇 유로를 건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하는 순간 유로를 건네어할 일이 없어진 오른손은 왼손이 들고 있는 플라스틱 상자 안에 담긴, 무더운 햇살을 머금고 더욱 맛있게 붉은색을 내뿜는 딸기 중 가장 토실토실하고 과즙이 잔뜩 머금은 녀석을 고르고 있었다.


선택을 받은 딸기는 제법 커다란 덩치와 무게감을 자랑하며 인형 뽑기 기계팔에 매달린 인형처럼 힘없이 오른손에 집힌 채 플라스틱 박스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턱 밑까지 도달한 순간 딸기의 달달하고 상큼한 향이 코끝을 찌르며 베네치아에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지금 내가 서있는 장소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 내 몸이 한순간 다른 모든 감각 세포를 지워버리고 후각에 집중한다. '하, 이거 향기 뭐야'


그리고 마침내 방금 전 마신 식수로 촉촉해진 내 입으로 거대한 딸기가 몸통을 입술에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들어와 달달한 향기와 상큼한 과즙으로 에피 타이징을 끝낸다. 뒤이어 몸통의 2/3 지점을 튼튼한 위아래 이가 깔끔하게 가르고, 그 틈으로 세어 나오는 달달하고 축축한 과즙이 혀를 비롯한 온 입 안에 새 신도를 축복하는 성수처럼 맛의 세례를 퍼붓는다. 


딸기 앙금과 딸기 과즙이 서로 어우러지며 점차 하나가 되고 이윽고 환희에 찬 장대한 마지막 대 서사시가 펼쳐진다. 꿀꺽. 입 안에서 사라진 딸기. 그리고 다시 찾아온 고요한 평온. 


사실, 이렇게까지 자세히 기억할리가 없지 않은가. 간단히는 '베네치아에서 먹었던 새빨간 딸기는 맛있었다'지만 분명 그 날의 여행 일상을 기록한 메모에는 저리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었다. 어디까지가 믿어야 할 진실일까. 기억에만 의존하고 의지하기엔 너무 빈 공간이 많다. 


참고로 과일의 맛은 단맛과 신맛 그리고 과즙이 어우러져 결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요소들은 일조량과 온도, 강우량 등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는데 과일의 단맛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일조량이라고 한다. 그래서 열대 과일이 맛있는 것이고, 일조량이 높은 베네치아의 딸기가 맛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게, 저 딸기가 베네치아 산인지 아니면 어디 핀란드 산인지 확인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알게 뭐람. 맛있게 먹었으면 된 거지!


그래서 여행에는 항상 기록이 중요한 것 같다. 기억은 잊히거나 사라지거나 부풀려지거나 줄어드니까. 그래서 나는 여행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여행일기나 사진을 많이 남긴다. 나중에 시간이 지난 뒤에도 간략하게 적은 여행일기에서, 그리고 단 한 장의 사진을 통해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쉽게 꺼낼 수 있으니까.



여담이지만, 아이슬란드에서 먹었던 딸기는 그리 맛있지 않았다. 북쪽에 있어서 그런가.. 그냥 사진으로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이것도 기억의 날조일까..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사진&글 by lai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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