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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이사 Apr 30. 2020

내가 나를 원하기까지

영화 '프란시스 하(2014)'



빛나는, 자유로운, 모험적인, 극단적인, 즐거운, 괴로운, 우울한, 열정, 회의, 방황. 이제까지 내가 본 영화들 속에서 '청춘'이란 단어가 갖고 있던 이미지들이다. 말만 들어도 가슴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듯 한 총천연색의 시절이 곧 청춘이었단 말이다. 영화 '프란시스 하'가 비추는 청춘은 이런 것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열띤 흔적 보단 담담한 말투와 무채색의 이미지로 청춘의 내러티브를 꽉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현실적인 모습들로.


1. 내가 바라는 만큼 그가 나를 바라는 건 아니다.


주인공인 프란시스는 뉴욕의 한 무용단에서 수습 생활을 하고 있는 현대무용가다. 무용가라 하니 꽤나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상은 전속 단원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팔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채로 연습에 임하는 여러 수습 단원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일반적인 영화에서였다면 주인공이 독기를 품을 상황인데, 프란시스에게선 독의 'ㄷ'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꿈을 좇는 데 있어 그녀는 조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대신 그녀를 안달 나게 만드는 건 변해가는 친구와의 유대관계, 뉴욕의 살인적인 집값과 생활비 같은 것들이다.


프란시스란 사람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술된다. 그녀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은 소피라는 절친.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며 뉴욕에서도 함께 살고,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남들은 쉽게 공감하지 못할 '싸우며 노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친하다. 서로가 오래도록 함께하는 미래를 꿈꿀 정도다.


F: 우리 이야기해 줘.
S: 좋아, 프란시스. 우린 세계를 접수할 거야.
F: 너는 출판계에서 먹어주는 거물이 되고.
S: 넌 완전 유명한 현대무용수가 되고. 난 너에 대한 비싼 책을 낼 거야.
F: 우리가 씹던 걔들도 관상용으로 한 권씩 사겠지.
S: 그리고 같이 파리에 별장을 사는 거야. 애인도 만들고, 애는 안 낳고, 대학 졸업식에서 연설도 하고, 명예 학위도 받고.

 

황량한 뉴욕이지만, 둘이라서 즐거운(것처럼 보였던) 프란시스와 소피.


그럼 뭐하나. 소피는 자신이 '맨날 노래를 부르던' 동네로 이사 갈 기회가 생기자 ‘널 떠나는 게 아니라 동네만 옮기는 거야’ 같은 소리나 하고선 프란시스를 떠나버린다. 이사한다는 것도 불과 하루 전에 통보하듯 말한다. '네가 원한다면 안 갈 거야'라고 했지만, 계속해서 자기가 얼마나 그 거리에서 살길 원해 왔는지 강조하는 소피에겐 그럴 의향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같은 방향을 향해, 같은 정도의 우정을 나누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관계는 한참 역전돼있었다. 소피는 프란시스 없는 삶을 기꺼이 찾아갔지만, 프란시스는 일방적인 친구의 모습에 속상함도 제대로 표현해보지 못한 채 홀로 남은 집에서 불안함만 곱씹는다.


(좌) 소피가 가고서 만난 벤지와 레브 / (우) 새로운 친구들과의 새 출발에 신이 난 프란시스, 하지만..


떠나버린 소피 대신  레브와 벤지란 남사친들을 만나게 된 프란시스. 쿨한 도시의 예술가 친구들과 함께할 새로운 삶을 기대하며 신나게 뉴욕의 거리를 내달리지만, 만족감은 한 컷에 그친다. 이들과의 관계에서도 프란시스는 마치 없는 사람처럼 희미하다. 화면은 분명히 프란시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집에 처음 놀러 간 날부터 나서서 요리를 해주고 있고, 무례한 말을 듣고서도(예를 들어 '얼굴은 이모뻘인데 철은 덜 들었네'라는 말) 받아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피도, 레브와 벤지도,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프란시스를 찾는다. 그러나 반대는 잘 성립하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를 얘기하고, 책 이야기를 하려는 프란시스의 발화는 농담 속에 곧잘 무시당한다. 프란시스가 어렵고 외로울 때, 곁에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프란시스에게 위로가 되어 주는 이는 없다. 각자 자기가 할 말, 자기감정, 자기 요구들을 프란시스에게 쏟아낼 뿐이다. 프란시스는 프란시스가 원하던 사람들과 자꾸 어긋난다. 심지어 자기가 하고 싶어 하던 일, 무용에서까지 말이다. 일도 잃고, 결혼으로 소피도 잃게 된 프란시스의 감정이 드디어 폭발한다.


넌 그를 사랑하지 않잖아. … 난 네가 울 때 옆에서 위로해주고, 네가 마시는 우유랑 약 숨기는 곳도 알아.
날 3시간짜리 브런치 친구 취급하지 마! … 갈라파고스 잘 다녀와. 나도 휴가 갈 거야. 이메일도 자동답장
설정할 거고, 음성 메시지도 자동응답으로 둘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마, 난 휴가 중이야. 돌아오면 연락할게.
- 약혼한단 소피와 다툰 후, 친구와 피앙세를 두고 먼저 자리를 뜨면서. 그래도 아예 관계를 끊겠다곤 못 한다.


갑자기 실업자가 되고 만다.



2. 흔들림 속에 중심을 잡아가다


일자리가 사라지며 집세를 내지 못하게 된 프란시스는 뉴욕을 떠나 고향 새크라멘토로 향한다(실제 프란시스 역할을 맡은 그레타 거윅의 고향이기도 하다). 오래된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프란시스는 어느 때보다 편안한 모습이다. 미뤄뒀던 치과치료 하고, 쇼핑도 하고, 식사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다같이 교회에 모여 '작은 빛을 비춰주리라, let it shine, let it shine'이라 하는 찬송을 부르기도 한다. 가사대로 정말 프란시스에게 작은 빛이 비춰지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지만, 그래도 고향은 고향일 뿐, 프란시스가 오래 머물 곳은 아니다.


프란시스가 훌쩍 떠나 도착한 곳은 새크라맨토, 가족이 있는 고향이다.


언젠가 콧등까지 욕조에 담근 채 생각에 빠져 있던 프란시스에게 엄마가 문 밖에서 'how much longer?' 이라며 재촉한다. 언제까지 화장실을 쓸 거냐는 물음이었겠지만, 자신을 '느리다'고 표현하던 프란시스의 삶을 조명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다른 사람들과 마주보는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또 언제까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무용가의 길에서 멀뚱히 서 있기만 할 것인가. 여전히 프란시스는 어떤 관계의 순간들을 그리고 있다. '내 사람'을 만나는 순간 말이다.


제가 원하는 어떤 순간이 있어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제가 원하는 건데, 그래서 제가 아직 싱글인 것 같기도 하고, 설명하긴 힘든데... 어떤 거냐면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땐 서로의 호감을 쉽게 눈치채잖아요. 하지만 파티에서 각자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있고 웃고 있는 상황에 눈을 돌리다가 서로에게 시선이 멈추는 거예요.
불순한 의도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이번 생에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서(because that is your person in this life)."

언젠가 끝날 인생이라 재밌고 슬프기도 하지만 거기엔 비밀스런 세계가 존재하고 있어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리만 아는 세계. 쉽게 말해서 우리 주변에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는데, 우린 그걸 느낄 능력이 없다잖아요. 그게 누군가의 관계에서 제가 원하는 거예요. 인생에서도 그렇고, 사랑에서도.
 
- 그녀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술김에 진심을 말하며.


즉흥적으로 찾아온 파리는 뉴욕만큼이나, 어쩌면 뉴욕보다 더 외롭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프란시스는 홧김에 신용카드를 긁어 프랑스로 여행을 간다. 단장과의 미팅 때문에 일정은 크게 못 지르고, 2박 3일. 반나절을 시차 적응으로 날리고, 늦은 오후와 밤의 거리를 걷는 순간에 그녀는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자꾸 다른 사람들을 보고, 다른 사람의 연락을 기다린다. 한껏 질려서 제쳐두고 온 뉴욕만큼이나 파리는 외롭다. 졸업한 학교로 돌아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소피를 우연히 만나 속내를 털어놓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둘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 소피는 남편을 따라 떠나는 길을 택하고, 프란시스는 급하게 떠나는 친구를 좇다가 문득 초라한 자신의 맨발을 응시하게 된다.  


급하게 소피를 따라나가 보지만, 소피는 떠난다. 헝클어진 채로 혼자 선 프란시스.


프란시스는 지금까지 자기 맨발을 본 적이 없었다. 관계에 함몰돼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 전속 무용가가 되겠다며 느슨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 어쩌면 맨발은 그녀가 회피해왔던 모든 사실들을 담아낸 상징이나 다름 없었다. 다른 친구를 찾으면 될 거다, 난 사실 혼자 있는 게 더 좋다, 뉴욕을 벗어나면 어떨까, 즐거웠던 과거의 공간으로 돌아가보면 괜찮아질까 했지만 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자기 자신 뿐. 사람들과 어긋날 때도, 가장 외롭고 암담할 때조차도 함께했던 존재인 '나'. '내 사람'인 그 사람은 바로 프란시스 자신이었다.


3. 바닥을 딛고 온전히 서기


맨발의 삶에 직면한 뒤 프란시스는 제쳐두었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중심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도망치지 않고, 하나하나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책임지는 삶을 살아나간다. 어딘가 흩어지듯 자주 끊기기도 하고, 가벼웠던 이전의 목소리와 달리 일정한 중저음으로 또렷하게 안무 일정을 컨펌하는 프란시스의 모습이 등장한다. 자신이 이미 무용수 자리를 제안받았노라 허풍 치며 거절했던 그 사무직 자리를 받아들인 거다.


낸시 자리 관심 있니? / 사무실 직원 낸시요? 아니요, 관심 없어요. / 무용 계속할 생각 없을 것 같아서. 평생 견습 생활만 하긴 싫잖아. / 싫죠. / 자립할 생각도 슬슬 해야지. / 어떻게요? / 네 작품으로. 난 네 안무 좋아해. 애들 안무도 좋고. / 정말요? / 낸시 자리 진지하게 생각해 봐. 큰돈은 아니지만 생활할 정도는 돼. /
왜 그래야 하는데요? / 그냥 생계수단이지. 안무를 하든 어쩌든 그건 차차 고민하고. / 쉬운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 아니, 쉽진 않지. 하지만 여기서 일하면 스튜디오도 쓸 수 있어.


쉽지 않다고 생각하며, 화를 내듯 거절한 그 자리에 프란시스는 다시 섰다. 무용가로서는 아니지만, 안무가로서 프란시스는 꽤나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무용가로서의 삶도 포기하지 않았다. 프란시스는 사무직의 상징인 H라인 펜슬스커트를 입고서도, 영화의 맨 첫 장면 공원에서처럼 여전히 춤을 추고 있다. 춤을 생각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의 삶도 달라졌다. 주연의 옆에서 덜 움직이는 게 자기 역할이었지만, 이제는 그녀 스스로가 무대를 움직이고 있다. 흔들렸던 모든 관계들이 곧 그녀의 멋진 안무로 이어졌다. 하나였다가도 셋이 되고, 가까워지려다가도 멀어지고 마는, 한 방향으로 함께 걷다가도 거스르기도 하는 관계. 모든 관계의 경험들이 그녀의 작품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자양분이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NcCsTpdFFYY


공연이 끝난 후, 사람들이 프란시스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프란시스는 그들에게 큰 관심이 없다. 여지를 남기는 듯한 벤지에게도, 작품을 칭찬하는 무용 선생에게도. 다른 사람과 말하는 내내 시선을 두긴 했지만, 소피와도 눈길만 주고 받으며 적당한 거리에서 만족할 줄 안다. 마지막 장면에서 프란시스는 소피와 함께 살던 뉴욕 집으로 다시 입주한다. 떠날 땐 한참이나 불안했는데, 다시 돌아와선 둘이었던 이 공간이 새롭고도 반갑다. 약간 들뜬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기 이름을 종이에 적어 내려가는 프란시스. 우편함에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를 꽂아 넣는다. 내가 나를 원하게 된 순간, 프란시스는 드디어 온전히 홀로 섰다.


온전히 홀로 선 프란시스 하.
XOXO, 흔들리던 시절의 프란시스와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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