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옛날, 파라오가 다스리던 이집트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강물이 핏물로 변하고, 메뚜기가 몰려와 작물을 다 먹어치웠으며, 해가 사라져 세상이 어두워졌다. 노역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주지 않던 파라오에게 신이 내린 벌이었다,라고 토라(구약성서 첫 다섯 편)와 성경에 나와 있는 얘기다. 아홉 개의 무지막지한 재앙 앞에서도 고집을 꺾지 않는 파라오에게 신은 마지막으로 모든 처음 난 것들이 죽도록 하는 병을 내렸다. 왕의 아들부터 하인의 아들, 가축의 처음 난 것들까지 다 죽고 나서야 파라오는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허락한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선 어떤 부음도 들리지 않았다.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Passover)은 이처럼 이스라엘이 자유를 얻어 이집트를 떠나오게 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자신들은 병과 죽음으로부터 지켜주고, 이집트에게만 병을 허락해 자유를 얻게 한 민족의 신을 높이는 날인 것이다. 그런 유월절을 앞둔 작년 4월, 트럼프 대통령과 유대인 공화당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열댓 명의 젊은이들이 갑자기 일어나 뭔가 외치기 시작했다.
“Jews are here to say, Occupation is a plague(유대인이 말한다, 점령은 역병이다)!”
점령이 곧 역병이라 외친 뒤 야유를 들으며 퇴장당한 이들 또한 유대인이었다. 팔레스타인 서안과 가자지구 점령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IfNotNOW’에 소속된 젊은 미국의 유대인들. 이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며, 자신들이 어렸을 적부터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만 정치와 역사 교육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 삼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모두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단 게 이들이 행동하는 이유다.
1. 어떤 장소를 차지하여 자리를 잡음. 2. 교전국의 군대가 적국의 영토에 들어가 그 지역을 군사적 지배하에 둠.
현재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건국되기 전부터 그 땅에서 살아가고 있던 팔레스타인 민족을 대거 추방시키고, 남은 이들에겐 조직적인 차별과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일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지역을 정해두고. 그곳에 출입할 땐 누구든(외국인은 비교적 자유롭지만) 검문소에서 꼼꼼히 검사를 받도록 한다. 그나마도 정부가 이스라엘인들의 이주를 촉구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이 잠식당하고 있는 추세다. 큰 돌을 세워 주요 도로를 막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유롭게 생활할 권리를 침해하기도 한다. 장벽을 세워 고립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투표권이 없고, 75%가량이 빈곤선 아래 위치한 채로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점령이란 역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돌을 놓아 길을 막은 현장. 서울시립미술관 '고향' 전시에서 발췌.
그래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오늘도 대립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계속해서 장벽을 향해 돌을 던진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항의이자 표현이다. 돌이 뭔가를 바꿀 수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돌을 드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에 억울함과 분노로 점철된 마음의 병이 자라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명이 잡혀가고, 죽곤 하는 게 어느새 일상이 됐다. 물론 이스라엘 병사들 또한 희생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돌고 도는 죽음의 굴레는 과연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역병은 안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밖으로부터 왔다.
서안지구의 장벽.
이스라엘은 되레 팔레스타인을 역병처럼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존할 수 없으니, 가두어 배제하고 없애야 할 역병 말이다. ‘IfNotNow’가 왜 ‘역병’이란 개념을 사용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이 ‘역병’이란 개념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 아닌가. 신이 이집트에게 내렸던 그 역병 덕분에 이스라엘은 그 옛날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억압당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자는 누구이며, 분노를 창궐시키는 진짜 역병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점령이 역병이다. 타인의 자유를 자신의 세상 아래에 두고자 하는 생각이 곧 역병이다.
이스라엘에서 직접 만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해변가를 산책하고, 성지인 통곡의 벽 부근에서 신나게 성년이 되었음을 축하할 여유도 있었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던 사람들. 긴 기간 살펴본 건 아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그들의 도시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조용하고, 남루했다. 격한 시위를 목격하진 못했지만, 어디서나 긴장이 도사리고 있었다. 검문소를 지나고, 길거리에 모여 있는 군인들을 볼 때마다 나는 문득문득 기시감을 느껴야 했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지만, 책에서 보고 들었던 이야기들이 사실임을 직면하는 데서 오는.
공항에서부터 자주 보이던 포스터들. 유대인들에게 귀환이란 자랑스럽고 감격스런 것이다. 그들이 돌아와 기뻐하는 '집'에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함께 거할 순 없는 걸까.
비단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다시금 횡행하고 있는 인종주의, 난민들에 대한 차별, 극단주의, 이 모든 것들 또한 역병의 범주에 속하고도 남는다. 여기선 우리 사회도 안전하지 못하다. 역병을 피하는 길은 상대방을 '점령'하려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인정하려 대화하는 데 있다. 함께 대비하고 싸워가야 할 것이 코로나 바이러스뿐만은 아님을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