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스 기사 정석의 아침
새벽 5시 30분.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진다.
스무 해째 같은 시간이다. 옆에서 코를 고는 아내 어깨에 이불을 당겨주고, 발소리 내지 않으려 양말부터 신는다. 부엌에서 믹스커피 한 잔 타 마시는 동안 오늘의 날씨를 확인한다. 비 예보. 승객들이 짜증 낼 거고, 정시 운행이 어려워질 거다.
현관문 열기 전 한 번 더 뒤를 돌아본다. 승민이 방에서 새어 나오는 컴퓨터 불빛. 어젯밤에도 "아빠 일은 재미없어 보여"라고 중얼거렸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니까.
47번 버스. 6시 10분 차고지 출발.
첫 정류장까지 가는 8분 동안 오늘의 점검 목록을 머릿속에서 돌린다. 타이어 공기압 정상, 브레이크 이상 없음, 에어컨 작동 확인. 스물여섯 개 정류장, 하루 평균 승객 340명. 사고 없이, 지각 없이, 민원 없이.
언덕마을 아파트 정류장, 6시 18분.
그녀가 탄다. 중간쯤 창가 자리, 형광색 앞치마에 베이지색 가디건. 교통카드를 찍으며 내 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인다.
"기사님, 안녕하세요!"
맑은 목소리다. 하루에 수백 명을 태우지만 왜 유독 이 인사만 기억에 남는지 모르겠다. 습관처럼 백미러로 그녀를 힐끗 본다. 손에 작은 보온병과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며칠 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화요일이었다. 승객들이 젖은 우산을 털며 올라타며 혀를 끌끌 찼다. 급하게 지갑을 뒤지는 바스락 거림, 물에 젖은 옷 냄새. 버스 안이 축축하고 무거웠다.
그때 그녀가 올라왔다. 신발 밑창의 물기를 휴지로 닦은 뒤에야 계단을 올랐다. 다른 승객들이 자리를 차지하려 서두르는 와중에도.
"기사님, 오늘은 고생 많으시겠어요."
운전석 옆 선반에 종이컵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유자차 향이 올라왔다. 달콤하고 따뜻한 냄새가 버스 안의 눅눅한 공기를 뚫고 번졌다.
그날 아침, 승민이와 또 말다툼을 했었다. "아빠는 맨날 핸들만 돌리잖아. 뭔가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아이의 말이 하루 종일 목에 걸린 가시처럼 따가웠는데, 낯선 사람의 작은 배려가 그걸 살짝 누그러뜨려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했다. 왜 굳이?
그 이후로 나는 백미러 습관이 생겼다. 신호 대기할 때마다 그녀가 뭘 하는지 슬쩍 확인하는 것.
창가에 앉아 손수건 위에 뭔가를 올려놓는다. 종이학을 접거나 작은 리본 매듭을 만든다. 가끔 작은 화분을 무릎에 올리고 잎사귀를 만지기도 한다.
"오늘도 한 사람이라도..." "괜찮아, 괜찮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엔 전화통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혼잣말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아니면 자기 자신을 달래는 것 같은.
이상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남한테 관심 가질 여유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런데 어느 월요일, 그녀가 타지 않았다.
정류장에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평소보다 10초 정도 더 기다렸다.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정시 운행, 정시 운행.
화요일도 없었다. 수요일도.
왜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그냥 승객 중 한 명일 뿐인데. 그런데도 그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속도를 살짝 줄이며 주변을 둘러보는 내가 있었다.
목요일 새벽, 승민이가 물었다. "아빠, 요즘 왜 그래? 뭔가 계속 생각하는 것 같은데." "... 그냥." "설마 여자친구 생겼어?"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당황했다. "야, 이 녀석아. 아빠가 그런 사람이냐."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정말 왜 이런 식으로 신경 쓰고 있는 걸까.
목요일 아침, 그녀가 탔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인사도 없었고, 형광 앞치마도 입지 않았다. 검은색 점퍼를 목까지 끌어올리고 마스크를 썼다. 평소 자리가 아닌 맨 뒷자리 구석에 앉았다.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백미러로 보니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안쓰럽다거나 걱정된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뭔가 균형이 깨진 듯한 기분이었다. 늘 남을 챙기던 사람이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게.
신호등에서 멈출 때마다 백미러를 확인했다. 그녀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였다. 가끔 손등으로 눈가를 닦는 것 같았다.
'괜찮냐고 물어볼까.'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바로 지웠다. 나는 버스 기사고, 그녀는 승객이다. 그게 전부다.
금요일도 마찬가지였다. 뒷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말이 없었다.
그날 중간 정류장에서 할머니 한 분이 올라탔다. 장바구니를 든 채 휘청거렸다.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할머니, 조심하세요!"
그 순간 뒷자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그녀였다. 벌떡 일어나 할머니의 팔을 부축했다. 며칠째 말도 없던 사람이.
"괜찮으세요? 다치실 뻔했네요."
마스크 너머로도 걱정이 묻어났다. 할머니가 고맙다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이고, 고마워라. 정말 고마워라."
"아니에요."
그 한마디 대답을 들으며 뭔가 알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이 다치는 건 못 보는구나.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그녀가 다시 평소 자리에 앉았다. 앞치마도 입고, 인사도 건넸다. 하지만 목소리가 조금 쉬어 있었다.
"기사님, 안녕하세요. 지난주에... 인사도 못 드렸네요."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끝내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오늘은 햇살이 참 좋네요."
설명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우기지도 않았다. 그냥 햇살이 좋다고 했다.
그때 깨달았다. 이 사람의 '유쾌함'이라는 게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떨어져도 다시 일어나려는, 무너져도 다시 웃으려는, 그런 의지 같은 거라는 걸.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가니 승민이가 거실 테이블에 엎드려 뭔가 쓰고 있었다.
"뭐 해?"
"진로희망란 쓰는 거야."
"뭐라고 썼는데?"
승민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 그런데... 아빠 일도 나름 괜찮은 것 같아."
"갑자기 왜?"
"그냥... 매일 사람들이 아빠 버스 타고 어딘가 가잖아. 그것도 의미 있는 일 아닌가?"
며칠 전만 해도 내 일을 하찮게 여기던 아이가 이런 말을 하다니. 뭔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이도 나름대로 뭔가 깨달아가는 중인 것 같았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렇네."
다음 날 아침 6시 18분.
그녀가 평소처럼 탔다. 인사를 건넸다. 나도 백미러 너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기사님."
같은 말이었지만 어제와는 다르게 들렸다. 아니, 내가 다르게 듣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47번 버스는 오늘도 스물여섯 개 정류장을 지나간다. 매일 같은 노선이지만 매일 다른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각자의 사정을 안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그중에는 남에게 유자차를 건네는 사람도 있고, 힘들어도 할머니를 부축하는 사람도 있고, 아빠 일을 다시 생각해 보는 아이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운전대 너머로 지켜보며, 조금씩 변해가는 사람도 있다.
오늘도 무사히. 사고 없이, 지각 없이, 민원 없이.
그리고 아주 조금씩, 어제와는 다른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