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계단을 세는 이유

- 청소 아주머니 순례의 하루-

by 월화수 엔 Jane

새벽 다섯 시 반. 순례는 물걸레를 꽉 짜내며 투덜거렸다.

"아이고, 또 이 계단이다 아이가."

76개. 1층부터 5층까지, 매일 아침 똑같은 계단을 닦아야 했다.

무릎은 쑤시고 허리는 삐걱거려도,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영감이 벌이가 없으니, 둘이 먹고살 돈은 순례 손에 달렸다.

"큰 놈은 대기업에 다닌다 카면서,

며느리는 생일이면 친정에는 케이크 사 들고 가도, 시어미는 까맣게 잊고…

작은놈은 착실하지만, 작은 며느리는 애 핑계 대고 시부모 반찬 한번을 안해주고…

아이고 참. 그냥 임영웅 노래 들으면 속 풀릴 낀데, 우리 며느리들 생각하면 속이 뒤틀려 뿐다."

중얼거리던 순례는 문득 멈췄다.

위에서 조용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둘, 셋…"

그 목소리였다. 매일 아침 계단을 세며 내려오는 그 여자.

순례는 고개를 들었다.

회색 재킷을 입은 중년 여성이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엔 젊은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오십은 훌쩍 넘어 보였다.

한 칸, 또 한 칸 밟으며 숫자를 세고 있었다.

"서른여섯, 서른일곱…"

이상한 버릇이라 생각했지만, 며칠 지켜보니 그냥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 여자는 계단을 세며 내려오면서, 난간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손수건으로 먼지를 닦기도 했다.

"쉰여덟, 쉰아홉…"

순례가 놓친 부분까지 닦고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에게 작은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손길이었다.

3층 모퉁이에서 그 여자가 멈췄다. 창가에 놓인 화분 앞에서.

"오늘도 안녕하세요. 조금만 더 버텨봐요. 우린 잘하고 있어요."

화분에게 말을 거는 듯한, 낮은 목소리였다.

순례는 걸레질을 멈췄다. 그 말이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우린 잘하고 있다? 누구랑? 뭔 소리고…'

"일흔둘, 일흔셋, 일흔넷…"

1층이 가까워졌을 때, 그 여자가 순례를 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고생 많으세요."

그리고 마지막 계단을 밟으며 말했다.

"일흔여섯."

순례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내가 매일 닦는 게 그리 많았나…'

그날 오후, 순례는 다시 그 여자를 봤다.

밖에서 돌아온 듯, 봉지 하나를 손에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이번에도 계단을 세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아침보다 작아졌다.

걸음도 무거워 보였다.

"스물여덟, 스물아홉…"

3층에서 그 여자가 멈췄다.

한숨을 깊게 내쉰 뒤, 봉지에서 작은 과자를 꺼내 화분 옆에 놓았다.

"오늘은 좀… 힘들었어. 그래도 돌아왔네. 너도 수고했지?"

그 목소리엔 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순례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여자 혼자 사는기 힘들지. 나이 먹어서도 더 그렇고…'

그 여자는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마흔다섯, 마흔여섯…"

순례는 물통에서 물을 조금 떠서 3층 화분에 부어주었다.

흙은 바싹 말라 있었다.

멀어지는 목소리.

"일흔둘, 일흔셋, 일흔넷…"

'저 사람도 나처럼 버티는 기네. 나는 임영웅 노래 들으면서, 저 사람은 숫자를 세가면서…'

"일흔여섯."

조용한 계단에 마지막 숫자가 울렸다.


다음 날 아침, 순례는 청소를 일찍 끝내고 3층에서 기다렸다.

"하나, 둘, 셋…"

익숙한 발소리와 함께 그 여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화분 앞에서 멈추자, 순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 화분… 물주는기, 그쪽이 가?"

그 여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네. 너무 말라 보여서요."

"참 예쁘게 자라고 있네. 내도 매일 보거든… 요즘 부쩍 잎이 많이 났구먼."

그 여자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요? 다행이에요. 뭔가… 살아 있는 걸 보면 저도 조금 살아 있는 기분이라서요."

순례는 그 말을 가만히 곱씹다가, 솔직히 물었다.

"그런데, 매일 계단 숫자 세시던데…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꺼?"

그 여자는 한참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 사실은요, 매일이 너무 똑같아서요.

아침에 일어나면 별로 할 일도 없고, 누구 만날 사람도 없고…

그냥, 내가 오늘을 잘 지나가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숫자를 세요. 하루를 세는 거죠."

"하루를 센다…"

"네. 오늘도 올라가고 내려왔다. 그래, 살아 있다. 그렇게요."

순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참… 맞는 말이네요. 나도 매일 닦는 계단인데, 개수는 처음 알았다니까. 그쪽 덕분에요."

두 사람은 잠시 웃었다.

"뭔 힘든 일 있으면, 화분 말고 사람한테 털어놓으소.

나도 요즘 며느리들 때문에 속 뒤집어져 죽겠는데,

임영웅 노래 들으면서 겨우 버티고 있어요. 사람이, 사람 말 들어야 사는 거 아이가…."

그 여자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해요. 정말로요."


그날 저녁, 순례는 집에 돌아가 영감에게 말했다.

"오늘은… 기분이 억수로 좋은 날이다."

"왜? 청소 일 잘 됐나?"

"우리 아파트에 참 괜찮은 사람이 산다.

내보다 어린데, 어찌 보면 내보다 철든 거 같기도 하고…

우리 며느리들이 저 사람 반만 따라 해도 내가 노래방을 열었을 낀데, 또 흉본다 아이가."

순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근데 오늘 한 가지 깨달았지. 나도 매일 뭔가를 세고 있었더라. 계단을, 걸레질을, 그리고 하루를 말이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다 잘 살고 있었구만. 그냥, 서로 몰랐던 거지."

그날 이후, 순례는 3층 화분에 가끔 물을 주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그 여인과는 짧게 눈인사를 나눴고, 화분은 천천히 잎을 늘려갔다.

76개의 계단. 누군가에겐 하루를 버티는 숫자였고, 누군가에겐 살아 있는 증거였다.

이제 그 길 위에는, 둘만 아는 작은 안부가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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