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웠다고, 고생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날 오후, 하얀 문서창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린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남동생에게 보내려던 편지였는데 "참 고생 많았구나. 정말 잘 견뎠어왔어..." 여기까지 쓰고 또 멈췄다.
몇 번이나 지웠다가 다시 썼다. 백스페이스를 누르면서 생각했다. 한참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동생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내가 어색했다.
어느덧 나도 40 중반을 넘어가고, 그 동생도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챙기며 자신만의 인생을 꾸려가고 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내 기억 속 동생은 여전히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 아이인데, 어느새 인생의 굴곡들을 혼자 감당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 굴곡 중 가장 힘들었던 건 몇 년 전 사업이 망했을 때였다. 사기를 당해 완전히 무너진 그때, 법원에서 온 통지서와 은행에서 온 독촉장들이 부모님 댁 우편함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온 가족이 조용히 힘을 모았다. 부모님은 평생 모으신 자산들과 말년에 고향에서 집 짓고 사는 게 꿈이셨던 아버지의 고향땅까지 내놓으셨다. 나는 퇴직연금과 신용대출 등 끌어모을 수 있는 돈들은 다 끌어모아서 보탰다.
"동생 도와야지"라는 말조차 당연한 일이라서 굳이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어느 밤, 술에 취한 목소리로 "죽고 싶다"라고 전화를 걸어온 동생에게 "엄마 아빠 생각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라고 했던 그 순간이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 있다.
지금 동생은 조용히 일어서고 있다. 건설사 하청 공사를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들 학원비를 벌기 위해 새벽까지 일한다. 명절 때 만나면 예전처럼 농담도 하지만 어딘가 어른이 된 무게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시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몇 달 전부터 글을 쓰고 싶어졌다. "참 고생 많았다"라고, "정말 잘 견뎌왔다"라고. 어른이 되어 자신만의 삶을 꾸려가는 동생을 보며 이제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첫 문장을 쓰면 손이 조용히 멈춘다. 한번 써서 전송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게 어딘가 두렵다.
길에서 만난 대학 동기가 말했다. "너희 가족 정말 대단하다. 나라면 못했을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목이 메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쓰고 싶은 건 그때의 고마움만이 아니었다. 한참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동생이 어느새 이렇게 어른이 되어 자신만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 그 성장 자체에 대한 경이로움이었다.
이번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글을 쓰려고 하니까 어려운 거구나.
그래서 이렇게 적어보았다. "참 고생 많았어. 정말 잘 견뎌왔구나." 딱 한 줄.
며칠 뒤, 용기를 내서 그 한 줄을 문자로 보냈다. "참 고생 많았어. 가장이 되어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 보니 대견해."
한참 뒤 답장이 왔다. "누나도. 그때 정말 고마웠어. 이제 괜찮아."
우리는 여전히 서먹하다. 길고 깊은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짧은 문장들로도 40 중반을 넘어 느끼는 형제애는 충분히 전해진 것 같았다.
글을 완성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걸 알았다. 완벽한 문장을 쓰지 못해도, 한 줄이라도 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걸.
며칠 전, 또 다른 용기를 냈다. 예전 직장에서 나를 괴롭혔던 이 부장이 퇴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카카오톡으로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그냥 한 사람이 떠나는 인사 정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글은 이상하다. 완벽하게 쓰려고 하면 한 줄도 쓸 수 없지만, 한 줄만 쓰려고 하면 의외로 쉬워진다.
그 한 줄이 때로는 긴 글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한다. 완성되지 않은 마음도, 불완전한 관계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작은 연결 고리들.
요즘은 자주 짧은 글을 쓴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때로는 나 자신에게. 긴 글은 여전히 어렵지만 한 줄 정도는 용기 낼 수 있다.
"오늘도 수고했어." "어른이 된 모습이 대견해." "고마워."
40 중반을 넘어서야 알게 된 것 같다. 형제라는 건 함께 늙어가며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라는 걸. 이런 문장들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긴 글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이 짧은 문장들만으로도 충분할지도.
혹시 그런 마음이 있나요? 나이가 들수록 가족에게 전하고 싶어지는, 하지만 말로는 어색해서 글로라도 남기고 싶은 그런 마음이.
괜찮아요. 한 줄부터 시작해 보세요. 완벽한 글이 아니어도, 짧은 문장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질 수 있으니까.
글쓰기는 완성이 아니라 시작에 관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오늘도 누군가에게 한 줄을 써보는 거. 그 작은 용기가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켜 나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