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특별한 공기를 두르고 기차에 오르다

by 레이크킴 Lake Kim

어제는 비가 왔다. 늦은 장마도 태풍도 아닌, 그렇다고 선선한 가을 비라고 하기엔 여름처럼 후덥지근한 비가 내렸다. 얼마 전 충동적으로 영주행 기차표를 예매해 놓았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번 여행은 안 가느니만 못 할지도 모르고 여행 내내 비를 맞으며 축축한 옷을 걸치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다행히도 여행 날 당일 새벽에 비가 그쳤다. 하늘에는 아직 불안한 구름이 가득했지만 비가 씻기고 간 거리의 사물들은 평소보다 청명했다. 나는 영주에서 보낼 1박 2일만큼의 짐을 싸들고 여행길을 떠났다. 깨끗이 청소된 공기를 가슴 가득히 담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며 긍정적인 예감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침 일찍 거리를 나서면 특별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 시간에 킥보드를 타고 노는 잠이 없는 아이들, 벌써 헬스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바리바리 싼 짐을 트렁크에 싣고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 저마다 주중의 고된 일을 마치고 게으른 잠에 빠져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른 시간부터 각자의 하루를 시작했다. 새벽의 설익은 공기가 주는 특별함을 몸에 두르고서.





기차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건장한 성인 남자 걸음으로 15분 거리의 길을 보폭이 좁고 행동이 느린 내가 18분 안에 갈 수 있을까? 나는 아무리 빨리 걸어도 이 정도밖에 안 되는데. 나는 거북이다. 생각만 빨리 할 줄 아는 거북이. 이렇게 점점 느려지다 몸이 아예 멈춰버리면 생각하는 기계가 될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며 걸어간다.


기차역까지 쭉 뻗은 길을 걸어가는데 앞쪽으로 나들이를 떠나는 가족이 보였다. 어쩐 일인지 파란색 셔츠를 입은 할아버지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있다. 땀이 아주 많으신 분인가보다 생각하며 그들을 제쳐 걷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할아버지 가족의 대화가 들렸다. 할아버지는 웃음을 섞어가며 할머니와 따님을 꾸짖고 있었다. 알보고니 따님이 퀘퀘한 옷장 냄새를 잡기 위해 섬유탈취제를 뿌렸는데 이곳 저곳 너무 많이 뿌린 바람에 아직도 마르지 않았던 거였다. 다른 옷을 입으려는 할아버지에게 할머니는 밖에 나가면 마를 거라며 그냥 입으라고 했고, 그말을 믿고 어쩔 수 없이 파란색 셔츠를 걸쳤지만 셔츠는 생각보다 빨리 마르지 않았던 것이다. 점점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워진 할아버지는 불평을 늘어놓는 척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으며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무언의 이해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연이 있으셨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할아버지 옆을 지나갔다. 그런데 할아버지에게서 폴폴 풍겨오는 꽃 향기에 숨기기 어려운 미소가 지어졌다. 애써 입꼬리를 내리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반대편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다른 사람도 웃음을 숨기느라 애먹고 있는 게 보였다. 날도 습해서 금방 마를 것 같진 았았는데... 할아버지 화이팅!




기차역에 도착하니 자판기 커피를 들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택시기사분들이 보였다. 묵직한 커피 향기를 온 몸에 두르고 역 안으로 들어갔다. 저마다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이 대합실에 꽉 차있었다. 대합실에는 앉을 자리가 없어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얼마 뒤 영주행 기차가 속도를 줄이며 다가왔다. 나는 영주가 경상북도에 있어서 구미-대구로 가는 방향으로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충북-강원도 방향으로 가는 선로로 달려왔다. 이쪽 방향이 맞는 건가 싶어 티켓도 다시 확인해보고 전광판에 쓰인 기차 번호도 확인했다. 내가 잘 못 온 건 아니었다. 이 기차가 맞았다. 나는 전광판에 뜬 대로 제천, 단양, 풍기를 지나 영주를 종착지로 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알고 보니 영주는 경상북도에 속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위쪽, 강원도 바로 밑에 붙어 있어서 대전을 기준으로 볼 때는 북동쪽으로 달리는 기차를 타야 한다.








짐은 어깨에 매는 에코백 하나. 예쁜 나들이 원피스가 아닌 청바지에 검은 반팔티. 얼굴에는 아파 보이기는 싫어 칠한 립스틱 외에는 어떤 색도 묻히지 않았다. 내가 준비한 건 영주행 기차표와 숙소뿐. 그리고 부석사 하나만 보고 와도 성공이라는 마음가짐. 이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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