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마음에 메아리를 치는 일

by 레이크킴 Lake Kim



기차는 아주 경이로운 일을 해낸다.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삶을 사는 성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어느 날 한시에 한 공간에 모여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좌우 2명씩 나란히 앉아 같은 풍경을 지나가며 자신들의 기억에 같은 시간을 새긴다. 비슷한 의미로 비행기나 버스도 놀랍지만 용처럼 기다란 몸통에 들어앉아 꼬불꼬불 가는 기차가 역시 제일이다. 그 다음이 지하철인데 지하철은 그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규칙성보다는 지하 깊은 곳에서 손잡이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의 리듬성이 재미있다. 한 번만 더 파생시켜보자면 저마다 예쁘고 멋있게 꾸민 사람들이 같은 음악과 조명에 몸을 맡기고 흔들어대는 클럽이라는 공간도 신기하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언제나 어떤 의미로든 놀라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지평선을 볼 수가 없다. 국토의 70%가 산인 이 나라에서 내가 서있는 곳은 대게 산이거나 산으로 둘러싸인 어떤 곳이다. 이런 나라에 사는 우리는 누가 말하기 전까지는 지평선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고 그러므로 지평선이 주는 탁 트인 느낌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답답하다고 느끼지 않는 건 어쩌면 우리는 지평선의 느낌은 몰라도 정상의 느낌은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고 반대편 산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를 듣는 일. 그것처럼 속시원한 일이 없다. 나는 가끔 마음이 답답할 때 실제로 산에 올라가지는 않아도 마음 속으로 소리를 지른다. 마음에 메아리를 치는 거다. 내가 아는 가장 높은 곳을 상상하며 그곳에 올라가 전경을 내려다보며 외친다. “내가 최고야!!” 물론 이렇게 좋은 말만 외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상상속에서라도 소리를 지르면 확실히 개운해진다. 더 나아가 어차피 상상이라면 우주 전체에 내 메아리가 울리는 상상도 해본다. 우주로까지 소리를 퍼뜨렸다면 이번엔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에게도 소리를 질러본다. 그 정도 일로 고개숙이지 말며 그 정도 일로 자만하지 말라고.





3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달리다보면 입이 심심해진다. 집을 나서기 전 커다란 박스에서 몇 개 집어 온 소포장 견과류를 꺼내 먹는다. 얼마 전 처음으로 소포장 견과류를 먹어보고 꽤 마음에 들어 가족들에게 대형마트를 갈 일이 있으면 꼭 사다 달라고 부탁했었다. 막상 대형마트를 가려고 한 날에는 매번 대형마트 휴무일에 걸려 아쉬워하던 차에 엄마가 홈쇼핑으로 하루에 한 봉지씩 먹는 견과류를 주문해줬다. 어느 브랜드의 어떤 구성으로 된 제품을 주문했는지 궁금해 여쭤보니 엄마는 당신이 주문해놓고서도 홈쇼핑 채널도 견과류 브랜드도 기억하지 못 하고 있었다. 대신 전화주문을 한 내용이 휴대폰에 자동녹음 되어있으니 그걸 들어보라고 휴대폰을 건네주셨다.

생기 넘치는 홈쇼핑 콜센터 직원의 인사로 통화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엄마는 평소답지 않게 직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재차 묻는가 하면 대답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귀를 더 기울여 들어보니 완전히 비몽사몽인 상태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새벽에 잠깐 잠에서 깨어난 엄마가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틀자 마침 소포장 견과류를 판매하는 방송을 하고 있었고, 잠결에도 내 생각이 나서 잠이 가득한 눈을 꿈뻑이며 전화번호를 눌러 주문을 했던 것이다. 힘겹게 주문을 마치고 엄마는 다시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니 어느 홈쇼핑에서 어떤 제품을 주문했는지 모를 수밖에. 말 그대로 ‘자나 깨나’ 딸 생각만 한 엄마가 사랑으로 주문한 견과류를 꺼내 먹는다. 한 알 한 알 먹을 때마다 꿈결을 헤매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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