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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크킴 Lake Kim Nov 29. 2018

비 오는 날의 긍정






비가 오는 날엔 지상의 빛이 바닥의 물결을 타고 퍼진다.
에어컨이 나오는 버스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창 밖을 바라본다.
밤길은 평소보다 알록달록하고 음악 너머로 잔잔한 빗소리가 들린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경치 좋은 호텔방에서 보이는 야경이 부럽지 않다.

저 멀리 신호등이 옷을 갈아입는다.
차들이 빨간 신호등 앞으로 속도를 줄이며 미끌어져간다.
파도의 끝자락이 퍼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정지한 버스에 앉아 감상에 젖은 눈빛으로 옆에 멈춰 선 회색 승용차를 바라본다.
검게 코팅된 유리는 운전자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철저히 개인적인 공간에서 운전자는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빗길 위를 달리는 한 개인의 낭만을 상상해본다. 
.
.
그리고 그 개인이, 그 운전자가 바로 나다. 
자동차 라이트를 켜고 알록달록한 물이 흐르는 길 위를 운전하고 있노라면 
생각만큼 그렇게..... 참으로...... 낭만적...일까?

온갖 색으로 범벅된 도로에서 차선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낮에는 흘겨만 보아도 뚜렷한 노란 중앙선조차도 색의 무리에서는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옆 차가 지나가면서 전면 유리창으로 물을 거하게 뿌리기라도 하면 
온갖 인생의 고뇌도 하얗게 멈춰버린다.
발끝으로는 브레이크와 엑셀 사이를 분주하게 번갈아가면서 밟았다 떼고,
손으로는 타이어가 물길에 휩쓸리지 않도록 핸들을 꽉 쥐어야 한다. 
눈, 귀, 손, 발을 제각기 움직이며 내 차, 내 재산, 내 생명을 무사히 지켜내야 한다. 
이런 위험들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면 뉴스에서도 주의를 주는 빗길운전,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재미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생각을 할 겨를 없이 오로지 운전에만 집중해야 하는 일, 
다양하게 주어지는 위험상황을 순발력있게 대처하는 일,
그 와중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즐기는 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지친 나에게 이런 일들은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재미있다. 

여기에 더불어 빗길운전을 할 때 써먹는 나만의 ‘정신승리’ 팁이 빗길운전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준다.

-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뿌연 유리창을 유심히 쳐다볼 때는
‘흐린 거짓들 가운데 진실을 보는 눈’을 기르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 물 위로 흩어진 색 때문에 차선이 보이지 않을 때는
‘물감 위를 달리는 이색적인 경험’을 한다고 생각한다. 
- 옆 차가 물을 뿌리고 가서 순간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물 한 방울 맞지 않는 쾌적한 워터파크’에 왔다고 생각한다. 
- 미끄러운 빗길 위에서 예고도 없이 급정차 하는 앞차를 마주했을 때는
‘브레이크와 엑셀로 즐기는 리듬게임’을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운전을 한다. 
굳이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오늘은 빗속을 달리며 그런 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조금만 우울해져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내가 
어쩌면 꽤 긍정적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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