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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크킴 Lake Kim Feb 23. 2019

철학의 쓰임



  나는 대학에서 철학상담이라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철학상담이라는 과목을 수강하면서도 한 학기 내내 철학상담의 개념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담을 받으러 가서 온갖 철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대화를 나누는 게 철학 상담인가? 각종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말로 내담자의 혼을 쏙 빼놓는 게 철학상담은 아닐까? 당시 철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 싫증이 났던 나는 철학 상담에도 회의적이었다. 어차피 철학은 쓸모 없는 학문이고 현실의 답은 철학 밖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나는 내 안에 얽힌 매듭을 풀어보고자 심리상담을 신청했다. 상담사의 방은 각종 논문과 전공 서적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그 방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묻어 두었던 기억을 되짚어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는 애초에 상담을 받으려 했던 부분 외에 다른 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휴대폰을 바꿀까 생각중인데 사실 저는 지금 휴대폰이 아직 쓸 만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허름해보이기 싫어서 바꾸려 하는 거예요. 제 삶의 많은 부분, 제가 샀던 많은 물건들이 남들에게 허름해보이지 않았으면 한다는 이유로 이루어지고 갖춰졌어요.


  나는 이 말을 하고서는 괜히 민망해 ‘물론 누구나 그렇게 살겠지만요.’라고 덧붙이며 내 진심의 무게를 덜어냈다. 상담사 선생님도 ‘다들 그렇게 살지요’ 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고 이 문제는 쉽게 넘어갔다. 이미 지난 상담 시간에 자존감에 대해 강의 수준의 지식을 나눈 바가 있기 때문에 같은 말의 반복이 될까봐 웃고 넘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존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허름해 보이는 내 모습이 용납되지는 않았다. 허름한 나를 바라보는 남들의 시선과 속내를 견딜 만한 힘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건가, 어떻게 하면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거지 꼴을 하고서도 떳떳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의 용기와 당당함은 어디서 나올까… 내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떠올랐지만 상담 시간 내내 상담사 선생님은 다른 문제에 대해 이야기 했고 아무 것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상담 시간은 끝이 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풀리지 않은 문제로 마음이 답답했다.


  운전을 하던 중 얼마 전에 철학 매거진에서 읽었던 글이 생각났다. 일상에 침투한 권력에 대한 글이었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모든 것은 뉴스에 있고 미디어의 마법은 우리에게 행복한 인생의 답을 제시해 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평균’과 ‘정상’에 가까운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며 우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간까지 저항은커녕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허름한 모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특정한 모습을 허름하다고 생각할까?’ 이 작은 질문 하나가 내 마음 속에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허름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항상 불편한 선택을 해 온 나의 문제는 나의 자존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허름한 기준을 정해놓은 바깥 세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만약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기준이 새로운 트렌드가 된다면 나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오랫동안 무겁게 자리했던 돌덩이가 가루가 되어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심리 상담은 오로지 나의 내면에서 문제의 시작과 끝을 찾으려 했지만 철학은 그 이상의 것을 보게 해주었다. 철학은 단순히 한 개인의 자아를 깊게 파고들거나 그의 주변 인물이나 상황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입당한 생각, 사회적 분위기, 주변인물과 상황이 그렇게 구성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번 경험을 통해 대학을 졸업한 이후 멀리해왔던 철학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만일 철학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내 자신을 ‘상담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지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철학은 당장에 실리적인 쓰임이 있는 학문은 아니지만 세상을 읽어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더 현명한 선택을 하게 하고 중심 있는 삶의 태도를 갖게 한다는 사실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아무쪼록 많은 변화가 있었던 귀가길이었다. 이제 손발 깨끗이 씻고 마음 편히 누워 잘 수 있겠다.   






+ 철학 매거진 정보 : 뉴필로소퍼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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