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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크킴 Lake Kim Dec 17. 2019

유병재와 이슬아 그리고 나


유병재 작가의 간결하고 기발하면서도 어딘가 정곡을 찌르는 농담집 <블랙코미디>의 마지막 부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마감이 없으면 똥도 싸지 못할 인간이다.>>


책을 읽는 내내 어쩜 이렇게 창의적인 문구로 책 한 권을  가득 채울 수 있을까, 이 사람은 타고난 천재가 아닐까 생각했던 나로서는 그 역시 마감에 쫓겨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 짜내 이 책을 지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이 정도의 책은 그가 갖고 있는 수 백만 개의 잠재적(?) 농담 중에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 역시 유명세를 탄 김에 농담 몇 개를 끄적여 아주 쉽게 책을 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처럼 기발하지도 창의적이지도 않아서 글 하나를 쓰기 위해서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해야 하는 사람은 책을 출판할 가능성이 없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마감이 없으면 똥도 싸지 못할 거라니. 물론 이 말조차 재치있어 분명 천재는 맞는 것 같지만, 천재도 마감에 쫓기고서야 책을 쓸 수 있었다니.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도 누군가가 강제하고 압박을 준다면 책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보였다. 현실에서는 누가 글을 청탁하지도 않고 따라서 마감이란 게 있을 리가 없는 글쟁이로서는 ‘마감’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처지가 부럽기만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마감’이 주는 희망적인 의미는 쉽게 변명으로 변질되어 갔다. <우리 애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리가 나쁜 애는 아니에요.>와 정확히 똑같은 맥락의 <내가 마감이 없어서 글을 안 쓰는 거지 마감만 있었으면 벌써 책 몇 권은 내고도 남았어.>라는 말이 내 가슴 속에 서서히 새겨지려 하고 있었다. 그 때 책장 한 켠에 꽂아두었던 이슬아 작가의 <일간 이슬아 수필집>이 눈에 들어왔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작가가 한 달에 만 원의 구독료를 받고 매일 글을 써 이메일로 보내주는 프로젝트를 하며 쌓인 글을 엮어 만든 수필집이다. 매일이라니. 처음 이 말을 듣고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초등학생 때 방학숙제였던 일기쓰기도 방학이 끝나갈 때쯤이 되어서야 몰아 쓰곤 했는데 에세이를 매일 쓰다니. 나는 한 번도 일기를 꼬박꼬박 쓴 친구를 본 적이 없는데 세상에 이런 사람이 존재하다니. 대단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매일 쓴 글은 분명 어딘가 부족할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웬걸 읽으면 읽을 수록 빠져들어서 오히려 아껴 읽기 위해 중간에 책갈피를 꽂아 두고 억지로 책장을 덮었어야 했던 날이 여럿이다. 그러다가 다른 책에 눈길이 가 잠시 책장에 꽂아두고는 잊고 있었던 숨겨진 보물을 오랜만에 꺼낸 것이다. 내가 아끼는 이 보물의 뒤에는 책을 광고하기 위한 문구가 써있었다.


<<아무도  청탁했지만 쓴다. 매일  편의 글을 발송하는 이슬아의 셀프 연재 프로젝트>>


아무도 청탁하지 않았다면 마감이 없었다는 건데 그럼에도 매일 글을 썼다는 이 말은 유병재의 책을 읽고 변명만 찾아냈던 나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한 방 날리는 것 같았다. 그 한 방을 제대로 맞고 정신이 번쩍 들어 지금 이 글을 쓴다. 유병재와 이슬아와 나. 한 방 날려줘서 정말 너무 고맙다.


두 명의 대단한 작가도 글을 쓰는 행위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지금 이렇게 글 한 편을 벌써 마무리 했고,

이렇게 계속 쓰면 되지 않을까 싶다.






#유병재 #블랙코미디 #이슬아 #일간수필집 #글쓰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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