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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크킴 Lake Kim
Jun 22. 2021
좋은 문장 앞에서 나는 무력해진다.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경지가 존재하는 것 같아 그 막막함에 머리 속이 하얘진다. 좋은 문장들은 마치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아 주인 행세를 하겠다는냥 묵직하게 들어와 앉아버린다. 쾅. 백지가 된 마음 위로 짙은 문장의 직인이 찍힌다. 그렇게 쌓인 백지만 세어도 벌써 수 천 수 만 장. 어찌 보면 내 문장의 바탕이 될 자산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마음 한켠에는 괜한 두려움이 싹튼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면서 따라할 수도 없는, 그렇다고 떨쳐버릴 수도 없고 영원히 기억할 수도 없는 분명한 모순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감히 쥐어 잡을 수 없는 한계 앞에서 나는 한없이 움츠러든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단어를 그런 문맥에 사용했을까. 어떻게 저렇게 여운이 남는 어미로 끝맺을 수 있을까. 나라면 적어도 세 문장은 필요했을 내용을 어찌 저리도 쉽게 풀어냈을까. 좋은 문장을 한 줄 쓰기도 힘든데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좋아버릴 수 있을까. 저 사람은 항상 저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걸까.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갖게 되었을까. 수 십 가지 의문이 일순간에 스친다.
이런 질문이 가장 강렬하게 떠올랐던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문학동네 시인선 100호 기념 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의 신형철 문학평론가와 박상수 시인의 ‘펴내며’를 읽었을 때다. 나는 이 시집의 어떤 시보다도 이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 평생을 글을 읽고 쓰며 살았을, 글에 관해서라면 어떠한 궁극에 도달하였을 이들의 문장에는 군더더기도 촌스러움도 없다. 문장이 아무리 길어도 이해하기 쉽고 쉼표 하나까지도 적재적소에 찍혀 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단어조차 우쭐거림이 없고 세련되었다. 모든 문장의 모든 단어가 정갈하게 자리잡혀 그 자체로 완벽한 노련미를 엿볼 수 있다.
두 작가의 짧은 산문에서 강한 충격을 받은 후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든 독서 관련 잡지든 대부분의 글과 관련된 책의 초반부에 위치한 추천사나 편집장의 글은 웬만해서는 보통 이상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글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나는 매번 그들의 문장에 압도되어 한동안 상기되어 있다가도 시무룩해진다. ‘상기되다’라는 단어와 ‘시무룩하다’라는 두 단어의 조합 외에 이 기분을 어떻게 더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여기까지가 내 문장의 한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써야 한다. 앞서 말한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말했듯 '우리가 아는 훌륭한 시인들은 타고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그저 노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필사적인 노력에 신비로운 것이라고는 없'으며, '노력이란,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는, 처절한 세속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책 너머 완벽한 문장에 대한 환상이 있는 어느 독자에게 이야기 하듯 굳이 이런 문장을 끼워 넣었다.
'조금도 신비롭지 않은 그 노동이 멈추면 시인도 함께 소멸된다.'
그의 문장 앞에 한껏 경건해진 나는 아마 내일도 몇 줄 정도 필사를 하고 글을 지어볼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껏 무력해진 만큼 언젠가 단단해지리라 믿는다.
+ 서점 사이트에서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책을 미리보기 하면 두 평론가의 글을 읽어볼 수 있다. 시간이 된다면 꼭 읽어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