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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크킴 Lake Kim Jun 30. 2021

흉터

지금 힘든 것도 나중에 다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라며 꾸역꾸역 견뎌내던 시기가 있었다. 일이 힘든 게 사람이 힘든 것보다 낫다는 말의 참뜻을 뼈져리게 느낀 매일이었다.

 
나름대로 충실히 인생을 살며 소문만 믿고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겠다는 가치관을 세웠지만, 악명 높은 상사를 만나 고생하며 적어도 이 세계에서만큼은 근거 없는 소문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중간에 인사 이동으로 새로운 구성원들이 들어와 그 상사를 겪어야 했는데 새로 온 이들도 똑같이 힘들어 했고 심지어는 각자의 긍정적이던 본성이 뒤틀려버리기도 해서 때로는 정말 미쳐버리지 않도록 서로를 보듬어주어야 하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한편으로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안도하기도 했다. 마침내 힘들어 했던 구성원들이 다같이 이 상사가 있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을 때 우리는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던 시간들도 다 뜻깊은 경험이 될 거라고, 이제 웬만한 사람을 만나서는 힘들어 하지 않고 어디서든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요즘 들어 그동안 고생했던 시간이 다 무색했다고 느껴진다. 분노의 역치가 올라가거나 인내의 레벨이 올라갔을 거라고 분명히 생각했는데, 이제 그 사람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힘든 이유는 어디에나 있었다. 많이 긁혔다고 단단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계속 다른 종류의 고통이 나타났다. 어느 날은 갈증이 나 물을 마시고 싶은데도 내 앞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사람 때문에 손이 떨려서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 처음 일을 생각했을 때 만났던 좋은 상사가 생각났다. 그는 그 때 당시 이미 경력 20년차 이상의 배테랑이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높은 파티션이 있어 나는 항상 파티션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발성이 남다른 것도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멀리서 듣기에도 자신만만했고 아무리 힘든 전화를 받아도 항상 친절하게 응대했다. 그러나 그의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직원의 말은 달랐다. 목소리는 그래보여도 전화를 끊은 후 양 손을 포개 잡으며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도 하고 어쩔 때는 화장실에 가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내 직장 생활의 멘토로 삼을 정도로 그는 한없이 훌륭해 보였는데 그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했다.

어딜 가나 타인을 할퀴는 사람과 이십 여년 동안 할퀴었음에도 매번 아파했던 사람을 생각하며 내가 겪은 시간들을 재해석해본다. 고난을 통해 단단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도 언젠가 의미있을 거라는 말은 실제적인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닌 내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억지로 믿어야 하는 거짓 희망이 아니었을까. 동화 속의 주술처럼 말이다. 한편으로는 그 말이 정말 의미를 갖게 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그렇다면 너무 아까운 인생이 아니었나 하는 마음이 교차한다. 의사가 처방해준 쓴 약을 삼키고도 약효가 들기 전까지는 돌팔이 의사가 아니었는지 계속 의심하게 되는 것처럼, 아직은 내가 삼킨 약이 의심스러워 이 생각 저 생각을 다 해보는 요즘이다. 애초에 삼키지 않았다면 좋았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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