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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크킴 Lake Kim Jul 01. 2021

한나 렌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을 읽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과거의 누군가가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이다. 미래는 오로지 현실의 상상을 통해서만 방향성을 갖게 되고 그런 점에서 SF소설은 그 무엇보다 탁월한 이정표가 된다. 다르게 해석하자면 SF소설은 누군가에게는 답답한 현실에 대한 탈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바로 나같은 사람에게. SF소설을 즐겨읽는 내가 책 띠지에 "옆 나라에 천재가 산다."는 정세랑 작가의 추천평까지 본 이상 이 소설을 지나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져버렸다. 이 책이 흥미를 끄는 부분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제목이다. 한나 렌의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칼 포퍼의 유명한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제목을 표방하고 있다. 그렇다면 칼 포퍼가 '열린사회'를 옹호한 것처럼 한나 렌은 '매끄러운 세계'로 나아가야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한나렌이 말하는 매끄러운 세계란 무엇이며 왜 칼 포퍼의 제목을 차용했을까? 이런 질문에까지 다다르자 이 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에는 총 6개의 단편소설이 담겨있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소설 3개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책의 이름과 같은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이라는 단편소설은 '승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승각이란 세계와 세계를 실시간으로 번갈아가며 살 수 있는 신기술이다. 몸이 불편한 현재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육상선수가 되어 운동장을 달리고 있는 또 다른 현실로 이동할 수 있고, 학교에서 공부하기 싫다면 침대에 누워 있는 현실로 마음대로 옮겨갈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무한한 평행우주 속에서 대체현실을 찾아 스위치를 바꿔가며 마음에 드는 세계를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지도 못 한 부분에서 충격을 받았는데, 바로 '승각'이 보편화된 세계에 살고 있는 주인공들에게는 우리처럼 단 하나의 세계에만 살 수 있는 현실이 그 자체로 장애이며 무력함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최선인 현실이 새로운 기술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현실이 될 수 있다니. 그러나 그들의 삶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느 한 가지 세계를 골라 그 세계에서 타인을 만나 관계를 맺어도 정작 상대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을 수 있으므로, 상대에게 지금 이 세계는 휴대폰 게임에서 자동플레이를 돌려놓은 것과 같은 상태일 수 있으므로, 우리가 만나는 타인의 눈에는 진실성이 결어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든 순간을 살 수 있는 승각사회가 과연 지금 우리의 현실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단편은 <싱귤래리티 소비에트>다. 미국의 우주선이 처음으로 달 표면에 내려앉고 닐 암스트롱이 성조기를 달에 꽂는 그 때 화면 너머로 보이는 스탈린의 동상. 이미 소련은 인공지능의 특이점에 도달해 미국을 앞질러버렸고 무력감에 사로잡힌 미국인들은 자유주의가 승리한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인공지능이 통솔하는 사회에 사는 소련의 국민들은 뇌 속에 심은 칩을 통해 '노동자현실'과 그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부여받는 '당원현실'이라는 인공지능 서비스를 이용한다. 주인공 비카는 노동자현실을 이용하다 갑작스럽게 당원현실을 부여받고 눈 앞에 뜨는 명령어를 수행하며 인공지능이 세력을 펼치는 소련의 진실을 마주한다. 이미 유튜브를 통해 돼지의 뇌에 칩을 박아 뇌파를 분석하는 실험 영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포유류의 뇌와 신기술을 결합한 미래적 추구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한 기술에 계급을 나누려는 이데올로기가 결합된다면 그것이 곧 '노동자현실'이자 '당원현실'이지 않을까? 물론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는 구입비나 구독료의 차이로 암묵적인 지위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소설 초반부의 설정 또한 흥미로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어 도피한 가상세계는 아닌지 의심해보게 해 익숙해진 현실에 상상력을 불어넣는다. 


 마지막으로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태운 고속열차가 멈춰선다. 이상한 점이 있다면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본 열차 속 아이들의 행동이 일시정지를 한 것처럼 멈춰있다는 것이다. 물건을 떨어뜨리는 중이라면 떨어뜨리고 있는 그대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게임 화면이 넘어가려는 그 순간 그대로 멈춰있다. 중장비를 동원해 열차를 옮기려 해도 옮길 수 없고 야구방망이로 유리창을 깨부수려 해도 유리창은 타격조차 입지 않는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열차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열차 안의 시간이 1초 경과하는 데에 밖의 시간으로 약 2600만 초가 필요할 정도로 느리게, 다음 정차역에는 서기 4700년 무렵에 정차할 정도로 느리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속화된 고속열차 속에 남겨진 이들의 가족을 '유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동안 언론에서 유가족이라고 비춰진 사람들과 세상을 떠나버린 이들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일들이 고속열차 속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행해진다. 흥미 위주의 자극적인 이야기가 생성되고 정치적인 수단으로 그들을 이용한다.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며 주인공이 저속화된 고속열차 속에 남은 친구들을 어떻게 구출해내는지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이색적인 청춘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나 렌의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그동안의 SF소설이나 영화가 이제는 새로울 것 없는 기술과 그 기술이 초래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배경으로 놓고 이야기를 전개한 것과는 다르게 지금까지는 생각해보지도 못 한 새로운 기술과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 세계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과거의 상상이 어느 정도 현실이 된 지금으로서는 이와 같은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SF는 미래에 대한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SF를 현대적 방식의 철학이라고 일컫고 싶다. 그렇다면 한나 렌의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훌륭한 현대철학 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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