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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크킴 Lake Kim Aug 30. 2021

할머니가 남긴 최후의 가치



내가 응애응애 세상에 첫 소리를 내뱉었을 때 할머니는 이미 80대였다. 늦둥이 딸이 낳은 늦둥이 딸. 그게 나였다. 얼마나 작고 소중했을까.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나를 강아지라고 불렀다. 강아지, 우리 강아지 왔니. 항상 흔들의자에 앉아 매일 같은 풍경을 보던 할머니의 품 위에 올라가 장난치는 꼬물거리는 작은 생명은 누가 봐도 강아지일 수밖에. 돌볼 기력은 없어도 강아지 밥은 챙겨주듯 할머니는 꼬박꼬박 나를 안아주고 예뻐해주었다. 어느덧 몸무게가 늘어 더이상 할머니의 품에 올라가지 못해도 정적만 흐르던 집 안을 시끌벅적한 소리로 가득 채웠으니, 그런 내가 떠나면 줄곧 엄마에게 전화해 허전함을 표하셨으니 할머니는 분명 작은 몸덩어리가 만들어내는 소음까지도 사랑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들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 혼자 남겨져 있는 시간이 많았던 할머니는 홀로 매일을 보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죽을 나이가 됐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셨을까?


할머니는 종종 엄마에게 전화해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아마 할머니가 90대가 되셨을 때부터였을 거다. 너무 오래 살고 있다고, 노안이 와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고 밖에 나가기에는 몸이 너무 약하다고, 아무 것도 랄 수 없는 상태로 숨만 쉬고 있다고,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고. 큰병에 걸리지 않고 장수하시는 할머니는 엄마와 나의 생명줄을 가늠해 볼 때마다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었는데 정작 할머니는 생을 지겨워하셨다. 일제강점기 때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독립을 한 후에도 6.25 전쟁이 나 피난을 다니고 그 이후에도 민주화다 발전이다 뭐다 결코 쉬운 시기가 없었고 그만큼 스스로를 돌보지도 인생을 즐기지도 못 하고 9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가버렸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할지도. 얼마 살지 않은 우리도 사는 게 지겹다고 생각할 때가 많으니.


그런 생각을 하시던 할머니에게도 한 번씩 위기가 찾아왔다. 대상포진이나 독감처럼 노인에게 더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것이다. 잘 됐다고 이 참에 죽으면 되겠다고 생각하셨을까?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병에 걸릴 때마다 병원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보란듯이 이겨내셨다. 엄마는 할머니가 의지력이 강해서 이겨낼 수 있었던 거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싸우기 싫어도 전쟁에서 질 수는 없다는 오기같은 거였을까. 할머니가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밤이고 새벽이고 엉엉 울면서 고속도로를 밟아 할머니가 계시던 병원으로 향하던 엄마는 항상 같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이겨내실 것 같다고 딱 한 번 가볍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항상 그래왔듯이 할머니는 다시 퇴원해서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한 번, 딱 한 번의 안심에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의지력으로 버티기엔 몸이 쇠약해서였을까 혹은 의지조차 다지지 않아서였을까. 그토록 죽기를 바라면서도 꿋꿋이 살아남던 이의 죽음을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개월이 지나도록 강인하던 한 사람이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누구에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살면서 남는 건 먹고 입는 것뿐이라고.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누구보다 죽음을 가깝게 여기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100년이 넘는 삶을 몇 번이나 반추하며 얻은 결과였을 것이다. 먹고 입는 것. 할머니가 남긴 최후의 가치. 그것들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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