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크킴 Lake Kim Jun 23. 2021

상추와 적겨자

다이소에서 가정용 텃밭세트를 사 상추를 키우고 있다. 설명대로라면 벌써 한 번은 수확하고도 남았어야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직도 엄지손가락 길이밖에 되지 않는다. 잎도 여려서 제대로 서있는 녀석이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상추를 나무랄 수는 없다. 상추가 꾀를 써서 일부러 시원찮게 자랐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상추에게 주어진 목적, 상추의 존재이유, 상추의 방향성은 오로지 성장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상추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든 나는 상추를 꾸짖을 수 없다. 다만 속상해할 뿐.



따지고 보면 모든 식물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생의 목적을 이루고 있다. 어느 하나 대충 자라는 줄기 없이, 깜빡하고 계절을 늦게 타는 이파리 없이 충실히 존재의 소임을 다한다. 입력에 따른 결과값을 내놓는 생물학적 기계처럼. 어쩌면 인간도 똑같지 않을까? 어떤 철학자들은 자유의지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의 선택은 과거로부터 꾸준히 축적된 무언가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결과일 뿐이다. 코카콜라가 펩시보다 더 맛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코카콜라와 펩시가 주어졌을 때 코카콜라를 고르는 것을 보고 100%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인이 대한민국에, 미국인이 미국에, 일본인이 일본에 애국심을 갖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가 간절히 추구하는 무언가도 가정용 텃밭에 심어진 상추의 운명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다만 입력된 데이터가 보다 형이상학적이고 다양할 뿐.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공정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못 한 것이 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선인 것이 반대쪽에 있는 사람에게는 악이 된다. 각자의 마음 속에 움튼 절대적인 믿음에 의문을 품지 않은 채 인류는 그동안 전쟁을 벌이고 이웃을 죽이는 끔찍한 만행을 벌여왔다. 단 하나의 방향성, 단 하나의 결과, 단 하나의 정의를 위해. 이제 와서 말하지만, 가정용 텃밭에는 상추만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겨자도 자라고 있다. 적겨자는 적겨자 나름대로 그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보면 상추의 뿌리와 얽히기도 하고 상추를 누르고 자라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는 어이없게도 상추와 그 바로 옆에 심어진 적겨자의 투쟁과 다를 바 없다. 내 텃밭에는 인류의 역사가 자라고 있다.



이쯤되면 신 혹은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가 왜 인류의 비극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풀린다. 그에게 우리의 투쟁은 상추와 적겨자의 투쟁만큼 하찮아보였을 것이다. 아니, 하찮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만큼 관심 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등산을 하며  소나무의 목을 죄던 담쟁이 덩굴을 보고 담쟁이덩굴이 심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혹은 해변가를 걸으며 만난 우직한 바위와 바위 위로 쉴 새 없이 몰아치던 파도를 보고 이번에는 파도가 너무했다고 판단하지 않았던 것처럼 신도 비슷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기준으로 어느 한 쪽의 편을 들 수 없는 것처럼 절대적인 심판자 또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다만 인간은 스스로 반성하고 서로 협력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무언가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이유로 다른 쪽을 해쳐서는 안 될 것이다. 내 적겨자와 상추도 알아서 가지런히 자라면 좋으련만.  

이전 04화 할머니가 남긴 최후의 가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