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자 게스트하우스의 호스트가 영주시에서 발간한 안내팸플릿을 펴서 무섬마을 가는 법을 알려줬다. 그녀는 팸플릿에 나와 있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말했다.
“이쪽 방향으로 쭉 걸어가시다 보면 기찻길 위로 육교가 나와요. 육교를 지나자마자 왼쪽 편에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거기서 22번 버스를 타고 가시면 돼요.”
나는 인터넷 지도를 찾아보지 않고 그녀가 설명해준 대로 걸어갔다. 아무리 걸어도 도로 위로 불쑥 솟은 육교가 보이지 않아 겁이 났지만 무작정 걸었다. 걷다 보니 발 아래로 기찻길이 지나갔다.
‘여기를 말하는 거였구나.’
왠지 그녀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22번 버스도 그녀가 말한 시간에 정확히 도착했다. 순조로웠다.
그러나 22번 버스를 타고 가다보니 버스 안내방송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버스가 어디쯤 가고 있나 보기 위해 인터넷 지도를 켰지만 ‘500m 정도 차이 날 수 있음.’이라는 안내문구가 떴다. 버스가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가자 이 안내문구는 나를 골탕먹이려는 듯 ‘1km 정도 차이 날 수 있음.’으로 바뀌었다. 아니, 1km 차이면 엄청난 거 아닌가!
이 때부터 나는 1km 정도는 걸어야 될지도 모르니 미리 마음을 먹고 비장의 여행스킬인 ‘주변 사람 살펴보기’를 시작했다. 이 스킬은 대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친구와 함께 해외여행을 갔을 때 유용하게 써먹은 스킬이다. 우리는 정말 아무런 계획도 없이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인 일본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유명 관광지나 교통 수단 등을 하나도 알아보지 않고 떠났다. 관광을 할 때는 주위를 살펴본 뒤 한국인처럼 생긴 사람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의외로 제대로 된 여행을 했고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후에 유럽여행을 할 때도 이 스킬을 자주 써먹었다. 물론 몇 번은 실패하기도 했지만 지금 산골짜기를 돌고 도는 버스 안에서 자칫하다가는 외지고 위험한 곳에 혼자 내려 기억에 깊이 남을 고생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버스 안에 탄 승객들을 살펴보는 것뿐이었다. 우선 봇짐을 진 할머니나 헐렁한 옷을 입은 할아버지는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들은 무섬마을에 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남은 사람은 등산복은 입은 아저씨와 배낭을 맨 아저씨 둘 뿐. 여자 혼자 여행하는 상황에 믿어 볼 만한 사람이 아저씨들밖에 없어서 불안감이 조금 더해졌지만, 내 직감만 믿고 이상한 곳에서 내리느니 누구라도 따라 내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 불안하면 버스에 계속 앉아 되돌아가면 되었다. 물론 이럴 경우에는 이번 여행을 결심한 내 자신을 탓하고 앞으로의 여행을 단념하며 속상한 마음으로 집에 되돌아 가겠지만. 그렇게 계속 눈치를 보고 있던 중에 부석사 정류장이 버스 노선의 종점이었던 것처럼 무섬마을 정류장도 종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지켜보단 두 사람도 왠지 종점처럼 보이는 회차로에서 내렸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나도 재빠르게 일어나 뒤따라 내렸다. 사진에서처럼 그곳에는 초록색 논과 길게 놓인 다리뿐이었지만 다리 밑으로 깔린 백사장을 보아하니 무사히 무섬마을에 도착한 것 같았다. 먼저 내린 두 분은 자연스럽게 다리를 건너갔다. 나도 그들을 따라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자 무섬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그 밑으로 부석사와 소수서원의 방향과 거리도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무섬마을을 관광하려면 어느 쪽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처음부터 무섬자료전시관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왠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뻔한 전시관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관광안내소 쪽으로 걸어갔다. 아까 버스에서 배낭을 짊어지고 내린 아저씨가 그 안에 앉아 계셨다. 이번에도 제대로 된 사람을 따라왔다는 생각에 괜히 기뻤다.
관광안내소로 걸어가면서 보이는 첫 번째 집에 이런 표지판이 있었다.
‘사람이 사는 가정집이니 조용히 보시면 고맙겠습니다.’
관광용으로 지어 놓은 한옥이 아닌 실제로 주민들이 거주하는 한옥이라니. 신기한 마음에 안내판을 찍었다. 여타 다른 관광용 한옥마을의 경우 사람의 숨결을 머금은 적 없는 껍데기 한옥이거나, 민박집을 겸하고 있어 타지인의 숨결이 섞인 한옥이거나, 먹거리와 잡동사니를 파는 자본주의의 숨결이 느껴지는 한옥이었는데 이렇게 오롯이 집 주인과 함께 늙어가는 한옥을 보니 그동안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찾은 듯 반가웠다. 비록 안에 들어가서 구경할 수는 없었지만 누구나 들어가서 쉽게 보고 나올 수 있는 한옥보다 몇 배는 더 흥미롭고 소중했다.
우연히 만난 얼룩고양이 한 마리와 푸른 나무에 둘러싸인 기와집과 초가집,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꽃밭과 이렇게 먼 곳에도 마련된 공용자전거. 세세하게 보자면 오래 볼 수도 있을 만한 것들이 많았지만 사람이 사는 집을, 그것도 추석 전에 온 가족이 몰려와 인사를 드리고 있는 집들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막걸리와 소주를 주 메뉴로 걸어놓은 곳에 혼자 들어가 커피를 마시는 여유를 부리기도 민망해서 자료 전시관을 구경하다가 강변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천천히 걷는다고 걸었지만 무섬마을이 생각보다 작아서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1시간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벤치에 앉아 전날 산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인터넷 서핑고 했지만 영 시간이 가지 않았다. 문득 스무 살에 기숙사 방을 같이 썼던 룸메이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나는 한동안 시간에 갇혔다는 생각에 괴로워 했던 적이 있어. 너는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에 강렬하게 남았다. 우리는 시간에 갇혔다. 동영상을 볼 때처럼 뛰어넘기거나 빨리감기를 할 수 없다. 시간은 내가 아무리 답답하고 다급하다고 해도 단 1초도 빨리 가주지 않는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온 우주가, 평면적으로 같은 시간에 박혀있다. 나는 무작정 1시간 반을, 90분을, 5400초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한땀 한땀 바느질 하듯이 지루한 순간순간을 정성들여 버텨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