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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디자인(2)

<디자인의 디자인> - 하라 켄야

by Lakoon
일상을 미지화한다 (p.37)


1. 일상은 따분하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부터 매일 똑같은 출근길, 일터, 퇴근길, 잠드는 순간까지 일상은 반복된다. 마치 어제가 오늘 같고, 지난 주가 지난달과 같고 내일도 다음 달도 반복되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은 사실 미지의 상태다. 매일 반복되는 삶에도 디테일은 매번 새로운 것이다. 반복된다고 생각하고 관찰하지 않으면 일상은 따분한 것이 되지만, 조금 더 느긋하게 관찰하면 일상은 미지의 것이 된다.


나는 가끔 필름 사진을 찍는다. 사진은 가끔 찍지만 그래도 카메라는 웬만하면 가지고 다니려 한다. 며칠 전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는 길이었다. 그 버스는 경복궁을 지나는데, 그날 내가 보았던 것은 무지개가 뜬 경복궁의 풍경이었다. 그 무지개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커다란 무지개였다. 경복궁의 건춘문 안쪽에서 시작하던 무지개는 북악산 전체가 겹쳐 보일 정도로 크고 아름다웠다. 잠시 넋 놓고 바라보다 급하게 카메라를 찾았다. 하지만 그날 필름 카메라는 내 가방에 없었다. 결국 폰 카메라로 찍었지만 필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날 아침, 별 생각과 기대 없이 일상을 대하고 카메라를 챙기지 못한 탓이다.


일상에는 당연하게 예상하고 뻔하게 생각하면 놓치게 되는 특별함이 있다. 일상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제로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도 창조지만 기존의 것을 미지화시키는 것 역시 창조라고 할 수 있다. (p.37)


2. 창작이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새로운 것의 정의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기보다는 몰랐던 것, 잊힌 것에 가깝다. 기존에 있었다고 해도 새로운 쓰임새를 발견한다면 그것 역시 창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것, 이미 존재하는 것을 완전히 잊고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전혀 새로운 쓰임새로 재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기존의 것을 완전히 잊는다는 것은 어렵고 새로운 관점의 하나이다.


아트는 개인이 사회를 마주 보는 개인적인 의사 표명으로 발생의 근원이 매우 사적인 데 있다.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그 동기가 개인의 자기 표출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쪽에 발단이 있다. 사회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석해 나가는 과정에 디자인의 본질이 있다. (p.38-39)


3. 디자인을 배우고 접하면서 늘 예술과의 관계에 있어서 생각하게 된다. 디자인은 예술의 일부분이기도 하면서 예술과는 별개의 영역이기도 하다. 분명히 디자인은 제품이지만 작품이 되기도 하고, 공산품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디자인의 목적은 예술의 목적과 분명히 차이가 있다. 디자인의 목적은 대중적이고 공적인 특성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쓰임 받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유일할 때 가치가 있지만 디자인은 널리 쓰일 때 가치가 있다.


디자인은 생활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문명 비평이기도 하다. (p.46)
"... 잘 생각해 보니 현재의 중립적인 상태가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의 디자인에는 쓸모없이 남아도는 메시지가 너무 많으니까." -사토 마사히코 (p.50)


4. 너무 많은 메시지와 디자인이 난무하는 현대사회에서 무엇이 가치가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무인양품 같은 브랜드가 가치를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행위와 연결 지을 수 있는 다양한 환경과 상황을 종합적이고 객관적으로 관찰해 나가는 태도가 '어포던스affordance'이다. (p.64)


5. 간혹 전혀 관계없는 물건들의 아귀가 딱 맞물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재미를 느끼곤 한다. 또 그런 이유로 새로운 활용성이 생기기도 한다. 앞의 경우는 정말 우연이지만, 실제로 디자이너가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상황을 의도적으로 연출하는 것이 어포던스다.


과학 기술은 분명 생활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해 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경이지 창조 그 자체는 아니다. 테크놀로지가 가져온 새로운 환경 속에서 무엇을 의도하고 실현할 것인가는 인간의 지혜에 달려 있다. (p.69)


6. AI가 완벽한 창작을 한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빅데이터로 이루어진 모방의 조합일 뿐, 사람의 창작을 능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과물을 선택하고 편집하는 최종 권한은 결국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완벽함보다 불완전함을 오히려 아름답다 느낀다. 공장에서 만들어낸 완벽한 조화보다 자연에서 키워낸 생화를 더 아름답다고 여기듯이.


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단 취급하는 영역을 시각적인 것으로 제한하고 있지는 않다. 촉각을 비롯하여 다양한 감각 채널을 향하여 메시지를 만들고 있다.
말하자면 정보를 다루는 인간은 감각 기관의 다발이다. (p.71)


7. 본문을 빌려오자면, 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이다. 비록 개인적으로 디자인 자체의 일은 지금 운영 중인 'BRAUN HAUS' 카페를 끝으로 더는 진행하지 않지만, 나는 디자이너라는 인식은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라 켄야의 표현대로 이전에는 내가 취급하는 영역을 인테리어라는 분야로 제한했다면, 이제는 공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감각(오감과 감정의 감각까지) 채널을 통해 브라운하우스라는 메시지를 만들고 있는 셈일 것이다.


인간은 매우 감각적인 수용 기관의 다발인 동시에 민감한 기억의 재생 장치를 갖춘 이미지 생성 기관이다. (p.72)
나는 감각 혹은 이미지의 복합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디자이너는 수용자의 뇌 속에 정보를 건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건축은 다양한 감각 채널에서 들어오는 자극으로 만들어진다. 시각, 촉각, 청각, 후각, 미각 나아가 그것들의 복합을 통해서 주어지는 자극이 두뇌 속에서 재생되어 우리가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이 출현한다.
즉 이미지란 감각 기관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들어온 자극과 그에 의해서 재생되는 과거의 기억이 두뇌 속에서 복합, 연계된 것이다. (p.73)


8. 디자이너는 디자인이라는 작업을 통해 완성된 제품을 만들지만,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각 사람들에게 '이미지'라는 개념을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것은 셰프가 하는 일에 비유할 수도 있다. 셰프는 완성된 요리라는 상품을 고객에게 제공한다. 하지만 맛이라는 것은 주관적이다. 먹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할머니의 손맛이 그려지고, 또 다른 이는 행복했던 여행이 생각난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이미지라는 '정보'다.


이미지는 추상적인 정보이며 그것은 감각하는 사람의 수만큼 증가한다. 모든 사람이 정확히 같은 이미지를 그릴 수 없다는 뜻이다.


정보가 대량으로 저장되거나 고속으로 이동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와 개인의 관계를 냉정하게 통찰한다면 정보를 얼마나 음미할 수 있느냐는 요인이 더욱 중요해진다. (p.108)


9. 정보를 음미한다는 것은 아마도 파인 다이닝과 편의점 음식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파인 다이닝과 편의점 음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극단적인 비교이지만 아마 식사 시간이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편의점 음식은 빠르게 배를 채우는 것이 목적이다. 파인 다이닝의 요리는 천천히 음식을 음미하며 셰프의 의도를 느끼는 것이 목적이다.


정보도 그렇다. 정보는 빠르게 훑고 지나가서는 뇌에 소화가 되지 않고 남는 것이 없다. 정보는 파인 다이닝의 요리처럼 천천히 음미해야 사람에게 의미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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