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자, 뭘 써야 할까? (p.115)
1. 글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지 간에 이 문제를 넘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의욕은 있어도 소재를 찾지 못한다면 무의미하다. 스스로 가장 알고 싶은 질문도 이것이다. 나는 뭘 써야 할까?
소설가가 되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책을 많이 읽는 것입니다. (p.118)
2. 글은 생각이 소화된 것이다. 생각을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생각의 싹을 틔워야 한다. 사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글이라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글이 필요한 것이다.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촉매로써의 또 다른 생각이 필요하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다음에 할 일은 자신이 보는 사물이나 사상을 아무튼 세세하게 관찰하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 아닐까요. (p.119)
3. 책을 읽어서 좋은 점은 '다른 관점으로 세상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면 같은 사물과 사상이라도 책을 읽기 전에 보았던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그래서 책을 읽고 무엇이든 세세하게 관찰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분명 다르게 보이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이래저래 생각을 굴려본다. (p.119)
4. 독서를 통해 생각의 싹을 틔웠다면, 이제 생각을 굴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눈덩이를 이리저리 굴리듯,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리다 보면 작은 주먹만 하던 것이 어느새 양손으로 굴리기에도 버거울 정도의 덩어리가 된다. 물론 모든 생각덩어리가 커지는 것은 아니다. 굴리다 보면 부서지는 것도 있고, 울퉁불퉁해지는 것도 있다. 그래도 생각을 굴리다 보면 또 다른 싹을 발견하기도 하고, 부서진 눈덩이가 각각의 커다란 눈덩이로 불어나기도 한다.
결론 같은 건 최대한 유보해서 뒤로 미루도록 합니다. 중요한 것은 명쾌한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그 일의 원래 모습을 소재=material로서 최대한 현상에 가까운 형태로 머릿속에 생생하게 담아두는 것입니다. (p.119-120)
5. 글은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생각은 꼭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결론을 이끌어내는 순간 생각은 더 이상 불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리저리 굴리다가 그대로 보관해 두어야 소재로써의 생각을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론을 내릴 필요에 몰릴 만한 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결론이라는 것을 사실은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p.121)
6.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어떻게 해서든 규칙을 찾아내려 하고, 빠른 시간에 결론을 내려 어떻게든 생각의 매듭을 짓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조급함은 글쓰기에 도움이 안 된다.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커질 수 있다.
머릿속에 다양한 것을 그대로 척척 넣어두면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남을 것은 남습니다. 나는 그런 기억의 자연도태를 선호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한번 머릿속에 들어가면 그리 쉽게는 잊히지 않는 법입니다. (p.124)
7. 생각에도 숙성이 필요한 듯하다. 생각을 시간의 채에 걸러내다 보면 중요한 알맹이만 남게 된다. 사실 나는 메모를 좋아한다. 나의 기억력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모든 머릿속이든 어쨌든 생각을 넣어주고 시간을 더하면 중요한 것이 남게 된다. 그 중요한 것이 소재가 된다.
뭔가를 쓰고 싶다는 표현 의욕은 없지 않은데 이거다 싶은 실속 있는 재료가 없었던 것입니다. (p.130)
8. 그래 나는 실속 있는 재료가 없던 것이다. 아니 재료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재료를 걸러내고 찾아낼 능력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실속 있는 재료가 없는 것이다. 항상 뭔가를 시작하고 싶은 의욕은 있는데 재료를 찾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