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는 감정의 평온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p.32)
1.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최악의 환경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홀로코스트가 자행됐던 그곳, 아우슈비츠일 것이다. 사실 그곳에서 견디고 살아남기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그 고통의 환경을 겪고 살아남았다. 그는 단순히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정신과 의사로서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기록하고 그 체험을 통해 인간 정신을 연구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혹독한 시련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연구한 사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위로도 얻었지만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내 삶의 괴로움이 그의 삶에 비할바가 아니고, 비교라는 자체가 그곳에서 고통받은 이들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사람의 삶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하는 고통이라는 요소에 대해서 이전보다는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을 통해 빅터 프랭클이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2.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든 감정의 평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이전에는 감정의 변화가 적은 사람이 뭔가 둔해 보인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와 달랐다. 일본의 작가 겸 의사인 와타나베 준이치는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원제 '둔감력')>이라는 책에서 둔감하다는 것은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마치 밖에서 폭풍이 몰아쳐도 튼튼한 건물의 내부는 평온한 것과 같다. 나는 빅터 프랭클이 그 상상조차 어려운 험한 곳에서 살아남은 이야기가 궁금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나도 그것을 배울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어려움쯤은 별것 아닐 것 같았다. 그처럼 강해지고 싶었다.
냉담한 궁금증이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도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이것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p.41)
3. 자기 객관화 또는 메타인지 같은 기술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정확하고 분별력 있는 관점을 심어준다. 그것을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연습하면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궁금증은 지식을 갈구하게 한다. 그 지식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저자는 호기심에도 감정을 섞을 수 있다고 표현한다. 호기심에는 적어도 두 종류가 있다. 열정적인 호기심과 냉담한 호기심. 열정적인 호기심은 호기심의 대상에 몰입하게 만든다.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다. 이런 호기심은 깊숙이 파고들어 간다.
반대로 냉담한 호기심은 대상과 거리감을 둔다. 멀면 멀어질수록 냉담해진다. 알아둘 것은 냉담이 뜻하는 것은 냉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냉담과 냉소에는 어느 정도의 무관심함과 쌀쌀함이 있다. 하지만 냉소는 여기에 더해 비웃음이 들어가 있다. 냉담한 호기심에는 비웃음이 없다. 냉담한 호기심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만든다. 그리고 대상은 자신을 포함할 수 있다.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중략)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p.69)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p.74)
4. 해뜨기 전 어둠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여명이 있어 비교되기 때문일 것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더 어두워진다. 삶도 그럴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삶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의 법칙은 우리의 삶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개선하려고 발버둥 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이 어둡고 희망이 없이 괴로움뿐이라면, 그것은 곧 빛이 다가오리라는 징조이다. 만일, 정말 만에 하나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한다. 운명이란 지나고나야 알 수 있으며, 나아지리라는 희망 없이는 세상을 살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p.77)
5. 유머는 고급 기술이다.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기는 쉬워도 함박웃음 짓게 만들기는 어렵다.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기는 1초 만에도 가능하지만 행복하게 만드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렇듯 비록 웃게 만드는 기술은 어렵지만, 유머의 재료는 어느 곳에나 있다. 삶의 어두운 곳에도 유머는 존재한다. 그리고 유머는 삶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p.79)
6. 다른 이의 불행을 통해 용기를 얻는다는 것은 대부분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첫 번째 이유는 빅터 프랭클이 겪은 고통과 불행 속에서 나의 삶을 비교하게 되고, 그가 겪은 바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용기를 얻는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일차적 이유만은 아니다. 정말 최악의 상황을 겪은 그이기에 그를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그가 겪은 고통에 비례해 신뢰가 쌓이고 그의 경험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는다.
7. 프랭클의 말대로 인간의 고통은 기체와 비슷하다. 마음이라는 방에 고통이라는 기체가 들어가면 그 밀도는 다르더라도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온통 고통이 자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의 그것은 주변에서 볼 때에 아무리 작아 보인다 할지라도 아주 괴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고통은 남들도 다 겪는 하찮은 것이다.' 라거나 '남들은 더한 고통도 겪는데 이것쯤이야.'라는 말을 스스로 하는 것은 용기가 되지만, 남들을 통해 듣게 되면 그것은 전혀 위로도 안될뿐더러 오히려 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을 무시하게 되어 오히려 분노를 얹어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일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 (p.79)
8. 행복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추상적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추구할 수 없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행복을 좇으면 안 된다. 마치 무지개 같아서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진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한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사소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유머를 즐기는 연습을 해야 한다. 행복은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매 순간 즐거움을 찾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행복은 곧 즐거움을 찾는 의지라 말할 수도 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p.108)
9. 자유.
아우슈비츠는 유대인들의 신체를 구속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정신만큼은 구속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이 자유는 인간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누구도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듯, 자유도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주어진 자유는 신체의 자유뿐 아니라 정신의 자유도 포함한다. 두 자유에 차이는 있다. 육체는 타인에 의해 구속당할 수 있지만, 정신에 있어서는 타인이 우리의 자아를 지배할 수는 없다. 모순적이지만 오히려 자유의지로 타인의 속박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자유는 신으로부터 주어졌진 은혜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사람의 자유다. 자유는 그냥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의지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유롭게, 그리고 자유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
시련의 의미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중략)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중략)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p.110)
10.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삶의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적극적인 삶. 우리가 각자의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미를 창조하는 삶이다. 두 번째는 소극적인 삶. 환경과 외부의 자극을 통해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다. 세 번째는 시련 속에서도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는 삶이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환경, 특히 부정적인 시련의 환경 속에서 나의 존재를 찾아가는 삶이다. 그리고 이 세 번째 삶이야 말로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있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다. 시련은 인생의 기본값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련의 의미를 찾는 삶이야 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