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와 취향, 그 사이의 것들에 대해서
'덕후가 되고 싶다.'
별로 군대 얘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사실 군인 이야기는 아니고, 군대에서 만난 한 덕후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의 부대 선임 중에는 건담 덕후로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처음 그 선임과 근무를 서게 됐는데 다른 선임의 팁 아닌 팁이 있었다.
"그 사람 앞에서 건담 이야기는 절대로 꺼내지 마."
한 때 나에게도 건담 피겨 하나쯤은 집에 두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친해지기에 나쁘지 않겠네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굳이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었다. 그럼에도 그와의 대화는 뭐든지 간에 기승전'건담'이었다. (실제로 그는 내가 그전까지 들어보지 못한 특이한 억양과 말투를 사용했다. 약간 굵으면서도 하이톤에 복식호흡을 사용하는 듯한 울림과 ~했는가, ~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어떻게 보누? 같은 말투를 사용했다. 착하고 순수했다.)
내가 디자인을 전공하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너는 디자인 공부하니까 건담의 디자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부터 "건담 시리즈 중에 방패 디자인은 어떤 게 더 좋지 않누?", "도쿄 여행 가봤는가, 거기 도쿄 오다이바 지역에 건담 모형은 몇 기의 모델인데 디테일이 어떻더나?", "건담 컬러의 조합은 어떤 게 더 낫다고 생각하누." 등 정말 끝이 없었다. 겨우 건담 피겨 하나 있다고 건담을 이야기하기엔 그 앞에서 나는 초라한 맛보기 수준이었다.
나중에는 그 얘기가 저 얘기 같고, 했던 이야기 같고 지겨워 슬금 피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과연 덕후란 이 정도구나하고 처음 느꼈었다.
나는 그의 덕후력에 공감하지 못했고 때론 무시하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그의 덕후력에 감탄한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자막도 없이 건담의 새로운 에피소드를 원작 애니로 보고 있는 모습을 봤다. 나는 그에게 모두 알아듣냐고 물었다. 나는 몰랐지만 사실 그는 일본어 고수였다. 따로 일본어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새로운 건담 시리즈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기 위해 자막 없이 건담 콘텐츠를 반복해서 봤을 뿐이지만, 실제로 그의 일본어 실력은 상당했다. (물론 건담이 아닌 일본어 능력시험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당시에 나는 그의 일본어 실력에만 감탄을 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내가 진심으로 감탄해야 할 그의 능력은 일본어가 아니라 진정한 덕후력에 있다고 느낀다.
세상에는 재밌는 것들이 많다. 흥미를 끄는 것들도 많다. 그만큼 각자의 취향과 취미도 다양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깊게 빠져들수록 남들과는 다른 뾰족한 취향이 생겨난다.
나도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진득하고 뾰족한 것, 나만의 취향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간혹 어떤 것에 빠지면 깊게 파기는 하지만 그게 오래가지는 않는 것 같다. 또 반대로 오랫동안 좋아하며 즐겨왔지만 생각보다 깊게 파고들지 못하고 딱 그 정도 수준으로만 즐기는 것들이 있다. 말하자면 나의 흥밋거리는 깊지만 짧다거나, 길지만 얕은 그 사이의 것들로 둘러싸인 느낌이다. 이래서야 도무지 뾰족한 게 생길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취향이 중요한 시대라고 한다. 퍼스널 브랜딩의 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브랜딩을 위해서 그 무엇을 좋아하지는 못하겠다. 뭔가 자연스럽지도 않을뿐더러 나의 감정이라는 것은 나의 의지와는 달라서 억지로 강요한다고 흥미를 갖지는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취향을 안다는 것은 '메타인지'가 뛰어나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본인의 취향을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나를 잘 알기 위해서는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자기 객관화는 나를 나에게서 떨어뜨려 타인이 나를 관찰하듯 바라볼 수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에 결국 나를 관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가 필요하다. 장치 혹은 관찰 대상을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의 감상을 글로 적는다거나 사진을 찍는다거나 영상으로 남긴다거나 따위의 것들이 그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덕후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찬사로써 최상급의 수식어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팬이 된다는 것. 그 팬을 넘어 마니아가 되는 것, 그리고 그 마니아 중에서도 최상위에 덕후가 존재한다. 단순한 애정을 넘어서 시간을 쓰고 지식을 쌓아 애정을 담아내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이 어우러져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그 존재를 나는 덕후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무엇 하나의 것에도 아직 덕후의 단계에 오르지 못했다. 무엇을 좋아한다고 얘기를 꺼내기에는 아직 초보 수준에 불과한, 아니 입문조차 못한 분야들이 너무 많다. 마치 건담 피겨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건담 덕후에게 감히 좋아한다 말을 꺼냈던 지난날의 나의 무모함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이유다. 그래서 그 무모함을 뛰어넘고 싶은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언젠가 내가 어느 한 분야의 덕후가 된다면 일상의 즐거움에 더할 나위 없을 거라 생각하며.
아직 덕후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것들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