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그루의 밤 ep.28
600년 전의 사랑이 지금 내 삶을 위로할 줄은 몰랐다.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는 귀신 이야기라기엔 너무 서글프고, 사랑 이야기라기엔 너무 철학적이다. 사랑과 죽음이 뒤엉킨 한 편의 짧은 고전 속에서, 나는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감정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야기는 전라도 남원에 사는 젊은 서생, 양생이 저포를 던지며 부처님께 배필을 기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장가도 들지 않은 채 홀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외로움이 고인 마음이 결국 신 앞에서 간절한 소원을 빌게 만든다. 그는 불상 아래 숨어 누군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마침내 한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한다.
그 여인은 부처님 앞에 무릎 꿇고 외로움을 호소하며 눈물로 기도를 올린다. 그녀의 고백은 마치 거울처럼 양생의 마음을 비춘다. 두 사람은 운명처럼 마주치고, 짧은 시간 안에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그 사랑은 현실의 것이 아니다. 여인의 부모를 만나러 간 양생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딸이며, 왜구의 난리로 목숨을 잃은 뒤, 부모는 매년 이맘때 부처님께 재를 올리러 온다는 것이다.
양생은 혼란에 빠지지만,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은 재산을 모두 털어 그녀를 위한 재를 올린다. 이윽고 다시 나타난 여인의 혼령은 그의 은덕에 감사하며, “다른 나라에서 남자로 태어났다”고 전한다. 죽은 여인이 환생하여 남자가 되었다는 환상적인 설정은 단순한 전생이나 윤회에 관한 서술이 아니다.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질 수 있고, 인연은 생과 사를 넘을 수 있다는 상징으로 읽힌다.
결국 양생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평생 약초를 캐며 혼자 살아간다. 그 삶이 고립이었는지, 해탈이었는지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는 누구보다 깊이 사랑했고, 그 사랑의 끝에 고요한 슬픔을 품고 살아갔다. 양생은 잊지 않으려 했고, 그리워하며 존재했다.
『만복사저포기』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 이야기와는 결이 다르다. 한 번의 만남, 짧은 동행, 죽은 자와의 인연. 그러나 그 만남이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바꾼다. 사랑이란, 꼭 오래 함께하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때로는 짧은 접촉이 더 긴 여운으로 남는다.
이 작품은 그렇게 말한다. 관계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이어지고, 사랑은 닿지 못한 채로도 존재할 수 있다고. 죽은 자의 진심은 산 자의 삶을 바꾸고, 그 변화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놓는다.
김시습은 단지 비극적인 사랑을 쓴 것이 아니다. 그는 ‘살아 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 사이에 얼마나 많은 층위가 존재하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은 닿지 않아도 생긴다. 존재는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다. 그 기억은 어느 지점에서, 우리를 다시 움직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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