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질문은 올바른 답을 이끌어내기 마련이다. 질문이 틀리면 제대로 된 답을 도출해 내기 어렵다는 뜻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질문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삶을 살며 흔들리는 이유도 어쩌면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못해서 였을 수 있다.
퇴사 후 삼 년 동안 나의 오래된 고민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였다. 나는 삼십 대 중반이고 퇴사 후 1편의 에세이와 2편의 장편 소설을 출간했다. 나쁘지 않은 결과지만 여전히 무명이고 수입이 없다는 데서 계속 좌절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래서 매번 내게 묻곤 했다. 이렇게 돈도 벌지 못한 채 나이만 먹고 계속 글만 쓰며 살아도 괜찮은 걸까?
이력서에 쓸 수 없는 시간들이 누적될수록 머리도 점점 무거워졌다. 세상이 좋아하는 조건대로 나 자신을 설명해지기 어려워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실패한 자리를 고집하고 있었으니까.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활동도 점점 사라져 갔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내게 질문을 했다.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글을 쓰고 싶다.” 이 마음속엔 이미 포기와 선택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회사란 무엇이고, 글쓰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내게 해보았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회사는 마치 족쇄 같다. 인정 욕구가 강해서 사람 눈치를 많이 보고 갈등을 해결하는 데도 어려움이 컸다. 출근해서 내가 느낀 거라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글쓰기는 자유롭다. 돈은 못 벌지만.”
이어지는 질문. “나에게 자유란?” 그에 대한 내 답은 “자유는 내가 성장하고 싶은 방향으로 살 수 있는 능력. 내 정체성의 목소리를 듣고 용기 내서 선택할 수 있는 것.”
이어지는 질문.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고, 무엇은 절대 포기할 수 없나?”
내 답은 “생존의 위협 단계가 아니라면 자유를 지키고 싶다.”
이어지는 질문. “지금 이 삶이 흔들릴 때마다 내가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힘들어도 뒤에서 내 등을 계속 밀어주게 만드는 이유는?”
내 답은 “나는 쓸 수밖에 없게 태어난 것 같다. 항상 슬플 때 종이 위에 울면서도 뭔가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으니까. 어쩌면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줬던 것 같기도 하고.”
이어지는 질문.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고백. 삶의 방향을 말하는 고백이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답을 얻은 나는 지금 이 삶을 조금은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걸까?”
답을 내리기 전에 주저했다.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 내 정체성을 인정해 주는 것. 그리고 그걸 지켜줄 사람은 가족도, 사회도, 친구도 아니고 오직 나라는 것.
아무래도 이번 생에서 나는 작가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고, 그걸 지켜줄 사람은 나뿐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