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려고 카페로 나왔다. 가장 집중이 잘 되는 곳은 ‘내 방’이라는 걸 알면서도 늘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카페로 향하곤 한다. 무언가를 대단히 잘 써보겠다는 심산은 아니고, 장소를 바꾸면 정신을 환기할 수 있기 때문에 종종 밖으로 나오곤 한다.
나는 집 근처의 웬만한 카페는 다 가봤기 때문에 어느 곳이 조용하고, 어느 곳이 활기 있는지, 어느 자리가 나를 오래 붙잡아두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 나는 이 층짜리 층고가 높은 대형 카페로 향했다. 무더위 탓인지 카페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문하기 위해서 십 분을 줄 서 있어야 했고, 음료를 받기까지 십 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주문한 아이스라테가 나오고 나는 위층으로 향했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를 바라보며 앉을까 생각했지만 스탠드 의자가 허리에 불편할 것 같아 근처의 테이블로 향했다.
나는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학가 근처라서인지 책을 펼쳐 놓고 집중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사이사이에는 둘, 셋씩 모여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중년의 사람들이 있었고, 창가 끝자락에는 혼자 앉아 묵묵히 시간을 보내는 노인도 있었다. 한 공간 안에서 전 세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한 톤 높여 말하는 사람, 의자 위에 발을 올리고 무릎을 세운 채 화면을 스크롤 하는 사람. 다양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카페가 생기기 전에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이렇게 전 세대가 한 공간에 머물렀을까. 장날의 장터, 먼 길 나그네가 쉬어 가던 주막, 마을 어귀의 커다란 정자나무 같은 곳이 머릿속에 스쳤다. 일제강점기에 처음 카페가 문을 연 뒤, 백 년이 지났다. 이제 현대의 카페는 각자의 목적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일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내 집 주변의 카페는 아이패드나 노트북 앞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은 몇 시간이고 차분히 앉아서 일을 하는 집중력을 보였다. 흔히 말하는 ‘카공족’이었다.
Z세대 구직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주 1회 카페에서 공부한다고 답했으며, 그 이유로 ‘집중이 잘 돼서’가 58%로 가장 많았다. 즉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만 빌리는 것이 아니라 이 장소에서 심리적인 편안함과 몰입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가 ‘판옵티콘’ 개념에서 설명했듯 다수의 시선이 존재하는 공간은 개인의 행동을 은연중에 조율하고, 일정 정도 자기 통제를 가능하게 한다. 카페 역시 완전히 혼자가 아니기에 그 속에서 긴장감을 느끼며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카페는 누군가와 대화하기 위한 자릿값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비율로 ‘작업을 위한 몰입의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왜 유독 한국에서 ‘카공족’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만큼 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걸까.
먼저 여유롭지 않은 주거 공간 때문일 것이다. 인구밀도가 높은 서울에서 청년들이 거주하는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원룸이나 고시원 같은 좁은 곳에서 청년들이 원하는 채광, 온도, 환기, 인테리어의 공간을 기대하는 어려울 테니 결국 답답한 집에서 나와 쾌적한 환경을 찾아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집 근처의 카페는 의자, 테이블, 콘센트, 와이파이를 제공해 줌으로써 훌륭한 작업 공간을 만들어준다.
또한 공공으로 늦게까지 이용할 수 있는 개방형 사회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공공 도서관이나 무료 오피스를 집 근처에서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센터도 흔하지 않다. 땅이 넓고 자원이 많은 해외에서 장소를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할 수 있겠지만, 과밀한 수도권에서는 오직 카페라는 단일한 공간만이 작업, 교류, 휴식의 기능을 도맡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효율을 중시하는 한국 특유의 경쟁 문화는 카페를 휴식이 아닌 일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날, 나는 그 생각을 더욱 분명히 해주는 장면을 맞은편 자리에서 보았다. 머리칼을 단단히 말아 올린 여학생 한명이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나란히 놓고, 테이블의 모든 콘센트 위에 전원을 연결했다. 잠시 후, 그녀는 취업 면접 연습을 시작했고 내가 자리를 뜨기 전까지 두 시간을 꼬박 그렇게 보냈다. 그 모습은 어딘가 기묘하면서도 낯설게 신선했다. 과도한 자의식이 만든 풍경이긴 했지만 동시에 많은 현대인들이 크고 작은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을 연습하고, 웃어야 하는 타이밍까지 정확히 반복하는 철저함. 그녀는 내로라하는 기업의 2차 면접 제안을 받은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고, 그것을 카페라는 공개된 무대에서 과감히 펼치고 있었다. 마치 ‘나는 이렇게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야!’ 라고 자기 홍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서 약간의 슬픔도 느꼈는데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무심함이 어쩌면 한국식 교육이 길러낸 이기성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성적으로 2차 면접 기회를 얻었는지는 내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그날, 나는 원치 않는 관객이 되어 그녀의 자기 인생 서사를 두 시간 내내 들어야 했다. 그녀는 자기애에 취한 듯 화려하게 ‘면접 준비’라는 무대를 연출했고, 나는 그 무대 객석에 앉힌 채 소비를 강요당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것은 피로감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카페를 나와서 들이마신 첫 공기가 유난히 상쾌했다. 북적거리는 카페 안에서 나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맞은편에서 아나운서처럼 입을 뻥긋거리던 그 여학생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문득, 내가 카페에서 얻은 것은 정말 ‘작업의 성과’였을까, 아니면 ‘생산적인 인간이라는 이미지’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그 둘이 섞여 있다면, 그 비율은 얼마나 될까. 나는 자유롭게 카페를 ‘이용’한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주변의 시선 속에서 감시를 당하면서도 생산성을 이어가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그곳에 머물게 한 건지도 모른다.
커피 한 잔의 연출 값.
푸코가 말한 ‘자기 감시’란, 타인의 시선을 스스로 내 안에 새겨 넣는 것이다. 나는 그날, 커피 한 잔 값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서 내 하루를 연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산적인 인간임을 연출하는 ‘나’와, 그 시대의 잣대로 나를 평가하는 ‘시선’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계약이 체결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