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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 없인 젤리도 없다는 현실

by lala

유튜브 쇼츠를 보다가 화면이 꺼지자, 검은 액정 위로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비쳤다. 조금 전까지 내가 보고 있던 건 육아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아기는 늘 그 존재 자체로 묘한 힘을 갖고 있는 듯하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 종일 오염된 생각과 지친 육신이 치유 받는 기분이 들곤 했다. 문밖을 나서면 "저 사람도 누군가의 자식일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억울한 마음을 눌러야 하는 날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아이를 마주할 때면, 다시금 웅크리고 있던 인류애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영상을 볼 때마다 나를 덮치는 자괴감도 있었다. 내가 과연 저런 가정을 꿈꿀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혹은 “역시 아무나 아이를 키우는 건 아니다”라는 체념. 육아 프로그램을 보는 나의 태도는 연애 예능이나 이혼 예능을 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과 갈등을 보며 은근히 위안을 삼거나, 결혼제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질문이 들었다. 요즘 한국 예능은 왜 죄다 연애, 결혼, 출산, 이혼 같은 사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는 걸까.


물론 미국이나 유럽,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도 연애나 가족을 소재로 한 방송은 존재한다. 하지만 대체로 경쟁 구조가 짜인 서바이벌 형식이거나 쇼 적인 요소가 강했다. 반면, 한국의 예능은 연애·결혼·출산·육아·이혼까지 인간관계의 전 생애를 따라간다. 특징적인 건 ‘관찰’이라는 방식이다.


여기서 한국 사회 특유의 관계 중심 문화를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은 남들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 유심히 살핀다. 남의 연애에 몰입하며 대리 만족을 얻고, 남의 이혼 과정에 함께 분노하며 댓글을 단다. 조금이라도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과 어긋나거나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가치관이 보이면, 곧바로 '공적 비난'이 쏟아진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패널들과 함께 욕하고, 훈계하며, 도덕적 우위를 확인한다. 이것은 단순히 TV 앞에 앉은 시청자의 자세가 아니다. 우리는 어느새 근엄한 연애 상담사가 되고, 시어머니가 되며, 훈육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방송사가 시청률이 보장된 ‘관계’라는 소재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자본주의 미디어 시장에서 당연한 흐름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끔 보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장면이 스크린에 떠오를 때, 나는 조금 슬퍼진다. 이를테면 육아 예능에서 둘째가 태어난 뒤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 집중될 때,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첫째를 앵글 밖으로 밀어낸다. 이제 막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우고 있던 아이는 나이가 들어 덜 귀엽다는 이유로 화면에서 지워진다.




영아기와 유아기는 부모와의 안정된 애착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다. 그 중요한 시간을 수많은 카메라 조명 아래에서 보내는 아이들이 과연 어떤 정서적 기반을 갖게 될지 아직 구체적인 연구 보고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너무 이른 시기에 자본의 시스템 안으로 끌려나온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들고 나자, 나는 자주 슬퍼졌다. 과자를 달라는 아이에게 “윙크를 해야 줄 거야”라고 끝까지 몰아세우는 어른의 목소리. 아직 말을 익히지도 못했는데 수십 개의 카메라와 마이크가 동시에 다가서며 '예쁜 짓'을 유도하는 광경. 아기는 어떤 선택권도 없이, 부모의 결정 아래 자신의 모습이 모든 이에게 영구히 기록되고 만다.


마음 한켠이 불편해지는 이런 장면은 연애 프로그램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단기간 안에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연애 예능의 구조 속에서 외적 조건을 갖춘 출연자는 빠르게 조명을 받는다. 반면 선택받지 못한 이들은 서서히 주변부로 밀려나고 이내 카메라 앵글에서도 사라진다. 물론 연애에서 외모가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관계를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요소는 내면적인 요소이다. 배려, 조율, 충돌을 감당하는 힘, 그리고 서로 맞춰나가는 섬세함. 이런 것들은 화면 너머로 쉽게 비춰지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방송은 그것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연애 예능은 지금 당장 ‘선택받는 법’에만 초점을 맞춘다. 여왕벌처럼 조명을 받는 사람은 언제나 멋진 외양을 지닌 자이며, 그 이후에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과 일상은 다뤄지지 않는다. 그들이 겪는 실제적인 상처와 일상은 이혼 예능에서나 파국적으로 소비된다.


애초에 원초적인 즐거움을 목적으로 편성된 방송을 보고 뭐가 그리 불편하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사랑 받기 위해 예쁜 짓을 해야 반응이 돌아오는 저 구조가,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조건을 갖추어야 존재를 인정받는 저 풍경이, 한때는 존재만으로 사랑받았던 ‘작은’아이가 어른을 닮아갈수록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저 상황이, 모두 불편하다. 귀여운 근로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 몸짓, 착한 행동을 해야만 칭찬 받을 수 있다는 분위기,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역할을 기민하게 감지하고, 그것을 성실히 수행하려 드는 표정들. 그 모든 것이 어딘가 모르게, 나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알고리즘은 조금 전의 아기 모습을 띄워주었다. “윙크 해봐. 너 윙크 할 줄 알잖아. 어서. 윙크해야 젤리 줄 거야.” 화면 너머 어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는 몇 번이고 고개를 내저으며 저항하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윙크를 한다. 그제야 어른은 웃으며 젤리를 건넨다. 카메라 밖에서는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반복되었을 장면. 아이에게는 윙크가 아니라, 사랑을 거래하는 방식이 각인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내 안의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아이’가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지금도 회복중인지도 모를, 내 안의 작은 아이가.



윙크 없인 젤리도 없다는 현실

사랑받기 위해 예쁜 짓을 해야만 하는 아이의 모습, 선택받지 못하면 조용히 지워지는 사람들, 존재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세상의 구조. 나는 어느새 화면을 보며 자꾸만 내 안의 어린아이를 떠올린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윙크 대신 사랑을 배우려 애썼던 내 안의 어린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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