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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덤, 도피와 위안 사이

by lala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전광판이 번쩍였다. 90년 대 전성기를 누렸던 아이돌의 얼굴이 광고에 실려 있었다. 광고는 특별한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새 일범을 홍보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팬들의 사랑이 칠 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광고판을 빌리는 데 드는 비용이 문득 궁금해졌다. 아마 수백만 원을 호가할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누군가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건 타고난 천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팬덤이라는 단어는 열광을 뜻한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다 내어주고, 돈을 쓰고, 시간을 내어주는 것. 예전의 나는 그 마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무료한 직장 생활 중 화면 너머로 생기발랄하게 웃고 있는 예쁜 얼굴을 보았을 때 얼음 같았던 내 마음이 봄눈처럼 녹아내리는 경험을 했다. 그 순간만큼은 살아 있다는 감각이 되살아났다.


직장에서 상사의 폭언을 들을 때도 불현듯 머릿속에 아이돌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장의 목소리는 뮤트가 되고, 화면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대신 재생됐다.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 다정한 목소리가 귓속에 울렸다. 점차 심신이 안정되는 기묘한 체험이었다.


알고리즘을 따라 흘러가다 보면, 그들의 데뷔 시절 영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화면 속의 어눌한 춤사위와 순박한 웃음을 보며 나는 뜻밖의 눈물을 흘렸다. 무료함과 폭언이라는 마취총을 맞은 뒤 마비되었던 내 안의 감각이 다시 깨어나는 듯 했다. 복잡다단한 엑셀과 피피티 자료, 근무 시간 내내 돌아가는 타인에 대한 경계의 레이더는 아이돌의 무구한 웃음으로 상쇄되었다. 정말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이 있다면, 그건 적어도 내게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무해한 귀여움은 억눌린 감정을 받아주었고, 나는 비로소 조금 자유로워졌다.


그들이 나를 모른다는 데서 허무가 찾아오기도 했다. 내가 본 건 소속사가 기획한 환영일 뿐일지도 모른다. 위로를 받았다고 믿었던 것은, 정교한 상술의 산물일지도. 그러나 굿즈를 손에 쥐고, 공연장에서 함성 속에 휩쓸리던 순간만큼은 분명 진실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교묘하게 짜인 상술과 내 안에서 솟구친 기쁨이, 마치 한 쌍의 춤처럼 수 개월간 얽혀 있었다.


그러던 중, 아이돌의 사생활 이슈가 터졌고 나는 자연스럽게 발길을 거두었다. 남은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허함이었다. 그때 내가 빠져 있던 것이 정말 그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내 안의 공허를 메우려는 몸부림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해가 뜨고 지듯 반복되는 회사 생활 속에서 내 감각은 산소호흡기에 매달린 환자처럼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렵게 취업했지만, 매일 마주한 것은 단물이 빠져버린 하루와 상사의 폭언뿐이었다. 내 안에는 슬픔과 공허가 층층이 쌓였고 나는 꽤 오랫동안 무언가 살아 있는 기운을 갈망했다. 내가 애정을 쏟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았던 것 같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혹은 그것이 AI일지라도 상관없었다. 단지, 지금 내 안의 빈자리를 잠시라도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파스칼은 인간의 불행이 결국 “자기 방에 혼자 머물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허기진 심장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고, 그것을 다스릴 지혜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에 매달렸다. 지금 당장을 바꿀 수 없으니, 임시방편이라도 나를 붙들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좀 더 내 욕구의 본질을 마주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현실 속에서 계속 마모되는 기분이 든다면, 그 이유를 끝까지 추적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나는 도피하듯 쾌락을 좇았고 내 안의 목소리를 더 큰 소음으로 덮어버렸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스스로가 안쓰러울 뿐이다. 그리고 이런 도피는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아이돌에게 기대었지만, 누군가는 드라마에, 누군가는 쇼핑에, 또 누군가는 술잔에 기댄다.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모두가 제각각의 방식으로 허한 마음을 달래려 애쓰고 있다.


아이돌의 사생활이 밝혀지면서 나의 팬덤 경험은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하지만 인생에서 무엇에 기쁨을 쏟을 것인가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나 또한 아이돌에게서 느꼈던 환희를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기획된 상술과는 별개로 당시의 내가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했던 방편이었고, 실제로 나는 울고 웃으며 내 감각과 애정을 회복했다. 다만 이제는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내가 무엇인가에 급속히, 맹목적으로 빠져들 때—그 기쁨은 정말 순수한 것인지, 아니면 혼자 방에 앉아 있기 힘든 마음의 그림자 때문인지.



펜덤, 도피와 위안 사이


결국 사생활 이슈로 나는 아이돌에게서 발길을 거두었다. 남은 것은 공허였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빠져 있던 것이 정말 그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허한 마음을 달래려는 몸부림이었는지. 파스칼은 인간의 불행이 “자기 방에 혼자 머물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했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고, 그 고요를 아이돌의 웃음으로 채워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생존의 방식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 웃음에 기대어 살았고, 실제로 울고 웃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묻고 싶다. 내가 무언가에 맹목적으로 빠져들 때—그 기쁨은 순수한 것일까, 아니면 홀로 방에 앉아 있을 수 없는 이유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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