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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와 ㅠㅠ의 나라

by lala

요즘 해외에서 올린 틱톡이나 유튜브의 댓글창을 보면 낯선 단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unalive”, “seggs”, “grape” 누군가가 장난치듯 써놓은 것 같지만 사실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철자를 고쳐 쓴 단어였다. 원래 의도한 단어들은 “죽다”, “성”, “강간” 같은 무겁고 자극적인 단어들이었다. 플랫폼은 위험하다고 여겨질 만한 단어들을 기계적으로 걸러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검열의 눈을 피하려고 단어를 바꾸고, 웃음 섞인 은유로 고치고, 이모티콘으로 대체해 버린다. 언어와 알고리즘 사이에서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거기서 어떤 창조성이 보였다. 어떻게든 자기 감정을 표현하려는 집요한 몸짓, 그 절박한 변주가 이상하게도 감탄을 자아냈다.


한국에서는 어떨까? 이런 알고스피크 같은 검열형 언어가 한국에도 적용되는 예가 있을까? “자살”이라는 단어 대신 초성만 남긴 “ㅈㅅ”, 진짜 울음 대신 채팅창에 붙여 넣는 “ㅠㅠ”, 웃음을 가장한 “ㅋㅋㅋ”. 해외에서 검열 때문에 새로운 조어가 생겨난다면, 여기서는 더 끈질긴 사회적 시선과 자기검열이 작동한다. 친구들과 주고받는 문자 속에도 늘 그런 표현들이 들어 있다. 저 기호들은 슬플 때, 힘들 때, 웃어야만 할 수 없는 순간에, 웃기지만 왠지 서글플 때, 심지어 비웃음조차 감추고 싶을 때 두루 사용된다. 굳이 누군가 “그 말을 쓰지 마”라고 경고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익숙하게 스스로의 언어를 깎아내고 있다.


얼마 전 저녁 식사 중, 내가 좋아하던 유튜버의 영상을 보다가 목이 메었다. 곱창을 맛있게 먹던 그녀는 갑자기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견 이야기를 꺼냈다. 눈가가 젖어 드는 순간, 그녀는 잽싸게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화면에는 “저 괜찮아여 ㅋㅋ”라는 자막이 물결처럼 흘렀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영상은 단순한 먹방이 아니었다. 웃음으로 애써 덮은 눈물이 우리 사회의 언어 습관과 왠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내 삶에서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마음의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낙인찍히지 않으려, 사랑받으려 눈치를 보는 일이 반복되었다. 나는 직설적인 말보다 완곡어를 택한다. “싫다” 대신 “조금 힘들 것 같아.” “안 돼” 대신 “글쎄, 생각해 볼게.” 결국 내 말은 언제나 완충 장치를 달고 있었다. 어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 내지만, 나는 오히려 내 감정을 덮는 데만 언어를 쓰고 있었다.

이런 생활이 오래 이어지다 보면 어느새 내 감정을 나도 잘 모르게 되는 순간을 맞게 된다. 나를 속이려고 저런 희끄무레한 답변을 쓴 것은 아니지만 저런 애매한 말들을 하다 보면 내 존재조차도 흐릿해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불편해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마저 평범함으로 안도하겠지만 나는 그 변화가 서글플 때가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내 행복을 방해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조차 알지 못한다면 누가 그것을 알아줄 수 있을까. 나는 내 행복을 위해 요구할 수도 없는 무능한 상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는 말했다. "마음에는 이성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만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이성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진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종종 남의 시선에 매여 내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언어에 족쇄를 채우고 내 감정을 가린다. 그렇게 살다 보면 마음은 점점 낯설어지고 끝내는 나 자신에게조차 닿지 못한다. 내 내면의 소리를 벙어리로 만든 사람에게 행복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나는 여전히 “괜찮다”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이건 내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이기도 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엔 그 말이 내 마음을 지워버리는 순간을 점점 더 자주 목격한다. 웃음 뒤에 남은 침묵은 오래도록 마음에 머문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씩이라도 용기를 내어 괜찮지 않음을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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