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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지 스테어: 표정 없는 세계의 아이들

by lala

동생과 함께 소품샵을 둘러보던 어느 오후였다. 키링과 문구류 상품으로 구성된 평범한 공간이었는데 이상하리만큼 낯선 기분이 들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마치 잠깐 다른 세상에 발을 들인 것처럼 어딘가가 어긋난 느낌이었다. 그 어긋남의 정체는 아주 단순한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점원이 건네는 인사말. 그리고 아무런 반응도 없는 손님의 침묵.


“어서 오세요,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점원은 입구로 들어온 손님에게 물었다. 손님은 이십 대 초반 여학생으로 보였는데 뭔가 찾는 게 있는 사람처럼 계속 두리번거릴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나는 여자를 한번 힐끔 쳐다보았다. 여자는 약간 멍한 눈으로 수상하게 매장 안을 돌아다녔다. 보다 못한 점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찾는 거 있으실까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너무도 조용한 정적이 수 초간 흐르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 둘을 바라봤다. 서로를 빤히 바라보는 그 장면은 묘하게 정지된 듯 보였다. 마치 둘 다 그 순간에 잠겨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냥 보는 거예요.” 잠시 뒤 여자는 점원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느리게 답했다. 그 표정에는 탐색과 거리감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한 눈빛 같기도 했고, 혹은 전혀 다른 종을 마주친 것 같은 경계심도 묻어났다. 여자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계속 점원을 바라보다가 이내 매장을 한 바퀴 돌고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그런 상황이 영 석연치 않다. ‘혹시 장애가 있었던 걸까?’ 하지만 어쩌면 조금 행동과 말이 느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 들어 젊은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에 드는 키링 몇 개를 골라서 계산대로 향했다. 앞에는 세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핸드폰을 보며 기다리던 나는 앞의 줄이 줄어들지 않자 고개를 들었다. 앞줄의 손님이 점원의 설명을 듣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약간 갸웃하더니, 그대로 점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앞에 보이는 고무줄이나 스티커 중에서 하나 골라 가시면 돼요.” 점원은 말을 반복했지만 반응은 없었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손님은 조용히 말했다. “…됐어요.” 그리고는 구매한 물건을 들고 매장을 나섰다.

마치 이 매장 안에서는 모든 것이 0.5배속으로 재생되고 있는 것 같았다. 속도라는 개념이 누그러진 공간.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라는 말이 이곳에선 무색했다. 시간이 뭉개져서 흐르고, 젊은 사람들은 어딘가 몽롱한 상태로 움직였다. 잠깐이지만 나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빠졌다. 드디어 내 앞에 서 있던 남자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카드를 손에 쥐고 기다렸다.

점원이 “카드 넣어주세요.” 하고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멍하니 서 있었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한참을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점원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고 그제야 남자는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동작 하나하나가 눈에 보일 만큼 느릿했고 나는 순간 애니메이션 ‘주토피아’ 속의 느린 은행원인 나무늘보가 떠올랐다. 너무 과장된 장면 같지만 그만큼의 속도였다. 그 풍경은 어딘가 기묘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느릿한 반응, 텅 빈 눈빛, 마네킹 같은 무표정. 이건 단순한 느림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이십 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감정 없는 표정으로 상대를 응시하는 장면을 두고 사람들은 “젠지 스테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성세대의 눈에 그러한 표정이 무례하거나 불편하게 비칠 수 있다. 말없이 누군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행위는 그들이 자라온 시대엔 도발이나 반항의 표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젠지 세대들은 아랑곳없이 침묵을 유지한 채 상대방을 빤히 바라본다. 그들은 왜 이러한 조용한 응시를 하는 걸까?

조너선 하이트는 불안 세대라는 책에서 “Z 세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돌려 흥미진진하고 중독성이 강하고 불안정하며, 그리고 아동과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대체 우주로 오라고 유혹하는 ‘포털’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서 사춘기를 보내는 역사상 최초의 세대”라고 말했다. 온라인 속에서 놀이를 경험한 그들의 뇌는 전 세대와는 다르게 재편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대면하는 것보다 온라인에서 짧게 이모지로 소통하는 것이 익숙하다. 그런 그들에게 "왜 직접 마주 보고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그들이 살아온 감각의 방식 자체를 부정하는 질문처럼 들릴 수 있다. 의도적인 무례함이라기보다 그저 몸이 기억하는 언어가 다를 뿐인 것이다.


전화 공포증, 이른바 ‘콜 포비아’가 Z세대 사이에서 유독 빈번한 현상이라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음성 통화는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이 거의 없이 실시간으로 반응을 요구한다. 이 압축된 소통 방식은 이들에게는 때로 숨 막히는 압박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들은 말실수를 걱정하고 동시에 유연하게 응답하는 능력에 자신이 없다고 느낀다. 어떤 이들은 이 낯섦을 극복하고자 스피치 학원에 등록해 천천히 말하는 법을 배우고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그들이 통화를 꺼리는 건 게으르거나 무례해서가 아니다. 단지, 소통을 익힌 방식이 다르고 감정을 표현하는 감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철학자 한병철은『피로사회』에서 현대를 “긍정의 과잉으로 병든 세계”라 진단했다. 극단적인 성과 지향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탈진해 간다. 이 집단적 피로는 Z세대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너무 이른 시기에 디지털 세계에 노출되었다. 자기 연출과 타인의 반응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해 온 세대.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 유튜브의 조회수, 틱톡의 짧고 강렬한 리듬이 감각을 날카롭게 과잉 활성화 시키고, 그 끝엔 감각의 무뎌짐이라는 반작용이 찾아온 것이다. 그 무뎌진 감각은 현실 속에서 무표정, 무반응, 침묵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말없이 바라보는 것—그것은 어쩌면 소진된 감정들이 마지막으로 붙잡은 균형점인지도 모른다.


젠지 스테어의 의미

낯선 응시는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종종 우리가 놓친 것을 가리켜 주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가 빤히 바라보는 건, 결국 서로의 얼굴이 아니라 사라진 세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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