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말끝마다 “그래도 돈은 잘 벌잖아.”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연예인의 부적절한 언행이 화제가 될 때도, 인플루언서가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도 이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자기 밥벌이를 한다는 사실이 마치 모든 결함을 상쇄시키는 면죄부라도 되는 양, 나는 그들에게 놀랍게도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런 말버릇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그저 내가 저소득자라는 자조에서 비롯된 것인지, 내 심성에 문제가 생긴건지, 아니면 어떤 사회적 기제가 작동해서 생긴 결과인 것인지 궁금해진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내 머릿속에 ‘돈만 벌면 괜찮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 걸까. 무엇보다 나는 돈을 벌지 않으면 대체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위로는 주입식으로 내려오는 공교육, 옆으로는 끝없는 경쟁을 강요하는 숫자들 속에서, 나는 점점 정해진 안전한 길만을 찾게 됐다. 그 길 위에서 내 선택은 늘 공포에 감싸인 채, 사회가 원하는 버튼을 발작적으로 눌러대는 식으로 움직였다. 주변의 다양성을 보지 못하는, 시야가 좁아진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사회에 효용을 제공하는 ‘인간 자원’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며, 반쯤 눈멀고 반쯤 귀먹은 채 버텨내고 있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치열하게 경쟁하며 자란 환경을 차치하더라도, 내게 돈은 늘 불안과 공포를 동반하는 대상이었다. 돈은 나의 감정을 다방면으로 건드리며 괴롭혔는데, 무능을 돈으로 환산해 평가하게 만들었고, 돈이 부족하면 내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처럼 압박감을 느끼곤 했다. 돈은 나를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나의 존재와 정서, 정신을 갉아먹고 규정하는 무언가였다. 나는 늘 ‘돈을 버는 상태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것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나가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실제적인 공포 때문이었다.
나는 돈이 내 삶을 ‘결정’짓는 열쇠처럼 느껴졌다. 내 자아실현과 욕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 요소로 유일하게 돈만 꼽은 것이다. 물론 돈을 기준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실용성과 가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세상의 다양한 가치 중 오직 한 가지, 경제라는 한 가지 부분으로 모든 걸 바라보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경제를 제외한 다른 부분의 가치를 평가 절하함으로써, 내가 다른 부분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서서히 줄어드는, 즉 천천히 가난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게 도대체 무슨 문제인가? 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존재 자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평가되는 지속적인 삶을 살다 보면, 평가와 비교 속에서만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인간은 서서히 병든다. 정신이든, 몸이든. 호흡기를 단 채 잠들어 있던 내면의 자아가 불현듯 깨어나 눈물까지 흘린다면, 이미 그 병은 오래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돈이 개입하지 않는 인정과 환대의 순간은, 내게 거의 기적처럼 다가왔다. 몇 해 전, 우연히 마주친 마을 축제가 그랬다. 그날은 주말에 약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운동장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는 홀린 듯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청에서 주최하는 마을 축제였다. 운동장을 둘러싼 먹거리 포차와 체험 부스, 무대가 들어서 있었고, 아이부터 노인까지 한데 모여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먹으며 노래를 불렀다. 그 광경은 내게 낯설 만큼 신선했다. 그때 누군가가 내 팔을 톡 건드렸다. 돌아보니, 중년의 여자가 커피콩으로 만든 선인장을 내게 건네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얼마냐고 물었다. 어떤 형태로든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몸에 밴 계산 습관 때문이었다. 여자는 웃으며, “이건 축제에 참여한 주민들에게 드리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무료로 입장한 것도 의외였는데, 이런 선물까지 받는 경험은 나에게 전혀 ‘체화’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마을 축제 한 번 공짜로 참여한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잊지 못할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인근에 살고 있는 이웃 주민들이 이렇게 살갑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 선물을 건네고, 내가 호의적으로 그것을-적어도 신천지일까 사기꾼일까 고민하는 순간을 만들지 않고-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세금을 내면서도 실질적인 복지 혜택을 체감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세금으로 운영되는 마을 축제를 경험해 보았다는 것이 신선했던 것이다. 그때 어디선가 꾕과리 소리가 울렸다. 운동장 정문에서 사물놀이패가 한 줄로 길게 들어서고 그 주변으로 아이들과 어른들이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문득 울컥 뭔가가 올라오는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가 건네는 미소, 공동체가 한마음이 되어 나누고 즐기는 일은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걸까? 어쩌면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내가 허덕이며 돈을 버는 궁극적인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금전 거래 없이도 주고받을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무언가를 ‘교환’했다는 감각. 그건 분명 의미가 있었다.
그날 교환된 건 선인장이 아니라, 나였던 것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자유는 ‘함께-있음’ 속에서만 발현된다고 말했다. 돈이 매개하지 않는 만남과 환대는, 나를 ‘효용 있는 자원’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그 경험이 내 안의 닫힌 문을 조금은 느슨하게 열었다.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이야말로, 나를 다시 세상과 연결시키는 진짜 통화(通貨)였다는 사실을, 그날 체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