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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착같이 변죽을 울린 뒤 밀려오는 감정

by lala

대학생 때였다. 첫 중간고사를 모두 마친 날,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멍하니 서 있었다. 대학 시험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말로 다할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그 기분은 낯설지 않은 감정이었다. 반년 전, 수능을 마친 날과 비슷한 질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능을 끝냈던 그날의 감정을 또렷이 기억한다. 마치 인생이 수능 한 번으로 판가름 날 것처럼 모두가 떠들어대던 시절. 그 폭격 같은 소음 속에서 철저히 순응하며 살아오던 나는 시험이 끝난 순간 느닷없이 한적한 공터에 홀로 내팽개쳐진 기분을 느꼈다. 무조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라고 해서 도착한 골인 지점에는 황량한 마음만 남아 있었다. 기력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정신은 이리저리 떠다녔다.

주입식 교육 아래서 철저하게 순응하며 자라왔던 나로서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감정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목표 지점에 도달한 뒤 찾아오는 극심한 공허함. 끝 모를 긴장감이 걷힌 뒤 밀려오는 낯선 고요. 그것은 내가 알던 세계가 조용히 무너지고, 새로운 고요의 세계에 진입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혹시 나만 이런가 싶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옆에 서 있던 수험생들 역시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방금까지 야만적인 경쟁에 내몰려 있었고, 이제 같은 공간 속에서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몇 주 뒤면 서로 다른 대학으로 흩어져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폭압적인 한 세계 안에 갇혀 있다가 이제 막 해방된 유약한 존재들일 뿐이었다. 실제 통계도 이를 방증한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5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중·고등학생 10명 중 2명은 최근 1년 내 우울감을 경험했고, 스트레스 인지율은 42.3%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경쟁 이후의 허무함이 단지 나만의 감정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대학생이 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첫 중간고사를 치른 나는 그때의 허망함을 느끼며 버스 정류장에서 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내 시야에 한 커플이 들어왔다. 둘은 손을 맞잡고, 다 저버린 벚꽃이 흩날리는 길 위를 걷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부럽다’고 생각했다. 주관적으로 봤을 때 그들은 특별히 잘생겨보이지도 않았고, 어디 하나 튀는 구석도 없었다. 너무 평범해서 놀라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을 보며 부러움을 느꼈고 그 감정은 내 안의 공허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너, 그거 남자친구 없어서 외로워서 그런 거야.” 친구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진실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진부하고 원색적일 정도로 편협한 말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그것이 내 문제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문제를 인식하면 곧장 해결부터 해야 한다는 강박은 어김없이 작동했다. 나는 내 감정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험난한 여정 대신 타인의 말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마치 오류의 원인은 모른 채 고장 난 프린터의 전원 버튼만 반복적으로 누르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충동적으로 소개팅에 나섰고,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나는 더 본질적인 것을 들여다봤어야 했다. 내가 느꼈던 허무는 단순한 연애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악착같은 노력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삶에 지쳐버린 데서 온 것이었고, 내가 목표라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남이 만들어놓은 ‘욕망’의 모형일 뿐이었다는 데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던져놓은 ‘욕망’이라는 미끼에 무분별하게 걸려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사회가 규정해 놓은 부표라도 붙들고 살아남으려는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너도 살을 좀 빼보는 게 어때?” 이번엔 친구들이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마치 살을 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해질 것처럼. 그 시절 나는 분명 정상 체중이었다. 하지만 석고가 깎여나가듯 감량하는 친구들의 몸을 보며 자연스레 나 자신을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저들이 저렇게 체중을 감량할 동안 나는 뭘 했단 말인가. 나는 또다시 고장 난 프린터의 전원 버튼을 발작처럼 누르기 시작했다.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헬스장을 등록했고, 죽을 듯 달렸고, 죽지 않을 만큼만 먹었다. 마침내 위염이 생겼을 무렵 나는 방학 동안 10kg을 뺄 수 있었다. 몸은 가벼워졌고, 실루엣도 살아났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놀란 반응은 뿌듯함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도 공허함은 전보다 더 깊이 나를 잠식했다.


세상은 그 이후로도 본질에서 벗어난 온갖 해결책들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그들이 제시한 방법은 표피적이고 일회적이며 소비적이었다. 마치 언 발에 오줌을 누듯, 지금 눈앞의 불편함만을 즉각 해치워 버리려는 처방이었다. 게다가 그 해결책들은 죄다 까다로운 변화를 요구했는데 정작 나는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괴리감이 커졌다. 나는 변죽만 울려대는 축적된 잡음에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미주

1 여성가족부, 『2025 청소년 통계』, 통계청 자료 인용,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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