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해버린 날들이 있었다. 그 말이 입에 붙은 건 언제부터였을까. 돌이켜보면, 지난 내 인생이 전부 그랬다. 친구들은 나를 ‘예스맨’이라 불렀다. 무엇을 하자고 하면 싫다 말한 적이 거의 없었고, 흔쾌히 맞춰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도 들었지만, 가끔은 이런 말도 들었다. “근데, 너 진짜 좋아했던 거 맞아?”
그 말이 한때는 ‘칭찬’처럼 들렸다. 내가 잘 배려해주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순간이 즐겁지는 않았다. 남자 친구와 헤어진 친구를 위로해 준답시고 샌들을 신고 다섯 시간 한강을 따라 걸었던 어느 여름날, 집에 돌아와 보니 발뒤꿈치엔 물집이 잡혀 있었다. 그 친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나는 분명히 힘들었다.
도대체 나는 왜 그렇게까지 괜찮은 척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불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도움을 청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외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 태도는 결국 나를 병으로 이끌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2년을 버티는 동안, 면역력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처음엔 단순한 장염인 줄 알고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는 당장 입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면역력이 거의 제로예요. 당장 입원하셔야 해요.” 그 말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입원 신청서를 받아 로비 의자에 앉아 있는데, 문득 다음 날이 새 직장 면접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 괜찮아. 내일 면접도 있고, 입원은 어려울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동생은 말없이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신청서를 들고 조용히 접수창구로 걸어갔다.
그렇게 나는 보름간 입원했다. 밥 한 술 넘기지 못했고, 하루에도 여러 개의 링거를 맞으며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사인 실 병실이었다. 옆자리 환자들은 내가 움직이지 않자, 정말 숨은 쉬고 있는지 살펴봤다는 말을 나중에 간호사에게 전해 들었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아픈 것보다, 본인들이 백업해야 할 일들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입원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무렵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새벽이었고 병실은 아주 조용했다. 나는 동생이 책상 위에 놓고 간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왜 나는 내 몸이 망가질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을까.’ 내 감정을 기록한 것이다. 감정일기 분량은 길지 않았다. 몸은 물론이고 언어도 무력했기 때문이다. 유려한 문장보다는 서툰 단어가 흘러나왔다. “미안하다” “몰랐다” “너무 힘들다”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꾹꾹 눌러쓴 말들. 아프다는 말조차 허락받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종류의 단어처럼 느껴졌다.
입원 이후의 삶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다. 습관은 지독해서 낡고 익숙한 방식으로 돌아가길 유혹한다. 나는 여전히 남 눈치를 봤고 내 감정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예스맨’이란 말은 단순한 성격 묘사가 아니라, 내게는 사회적 생존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필요를 뒤로 미루며, 되도록 무난하게 관계를 유지하려는 태도. 익숙했지만 외로웠던 방식.
미국 작가 벨 훅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픔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회복은 시작된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지 않으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아프다고 말하면 정말 아픈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감정을 삼켰지만 그 억제는 병든 고립으로 이어진다. 괜찮지 않다는 자각은, 괜찮아지기 위한 첫걸음이 되기도 한다. 이 글은 그런 시작을 위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