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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나를 지키지 못할까

경계를 넘는 사람들 | 문학과 철학의 밤 산책 – 한 그루의 밤 19.

by lala

〈나는 왜 나를 지키지 못할까 – 경계를 넘는 사람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은 열다섯 살 반의 프랑스계 백인 소녀와 스물일곱 살 중국인 남자 사이의 사랑을 그린다. 1930년대 식민지 인도차이나, 식민의 권력 구조와 계급, 인종, 문화, 성별, 나이의 경계를 모두 넘나드는 이 사랑은 단순한 금지된 관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살아남기 위한 감정의 착각이며 동시에 치열한 자기 상실의 기록이다.


소녀는 말한다. “내 나이는 열다섯 살 반이고, 이미 세상을 다 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자신을 포기한 사람의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장식하고, 사랑이라는 언어로 포장된 관계에 자신을 내맡긴다. 낡은 남자 구두, 닳아빠진 모피, 그리고 실크 드레스 위의 화장. 그녀는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누군가의 욕망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구조적 생존에 가깝다. 그녀는 사랑을 시작하면서부터 스스로를 잃는다.


관계를 통해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경험. 실존심리학자 루드비히 빈츠방거는 이러한 상태를 “자기 상실”이라 불렀다. 그는 인간이란 독립된 고립체가 아니라 ‘세계-내-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은 언제나 관계 안에 놓여 있으며, 그 안에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형성해간다. 하지만 경계가 무너질 때, 즉 타자와 나 사이의 선이 사라질 때, 존재의 붕괴가 시작된다. 관계는 돌봄의 언어가 되기도 하지만, 침입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연인』의 소녀는 점차 사랑 안에서 자신을 잃는다. 그 관계는 그녀를 돌보지 않는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 방식은 그녀의 내면을 보호하거나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금기를 뛰어넘는 스릴이었고, 욕망의 대상화를 통해 유지되는 관계였다. 소녀는 그런 사랑을 받아들이며 자기를 내어주었고, 그 대가는 오래도록 마음 깊은 곳에 남게 된다.


빈츠방거는 건강한 실존을 위해 “투명한 경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경계는 벽이 아니다. 그것은 창이다. 타자와 연결되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구조.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창을 없애버린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해라는 핑계로, 혹은 나쁜 사람 되기 싫어서.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단 점거당한 감정을 방치하고, 마음 한구석을 내어준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도 나를 잃어간다.


경계를 침범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일 수 있다. 나를 도와주는 척하지만 끝없이 감정적 의존을 유도하고, 나를 불안하게 만들면서도 곁에 머물길 바란다. 중요한 건, 그들이 나를 침범하도록 허락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사랑받기 위해서라면 나를 조금쯤 내어줘도 괜찮다고 믿는 마음. 그것이 자기 상실의 시작이다.


소녀는 이야기 말미에서 말한다. “그 남자를 사랑했는지 이제는 모른다. 하지만 그를 잊은 적은 없다.” 무엇이 사랑이었고, 무엇이 자기 상실이었는지는 흐릿해진다. 남은 것은 마음 깊은 곳에 남은 무형의 흔적, 경계가 무너진 자리의 상처다.


진짜 사랑은 나를 지켜주는 사랑이다. 나로 존재하게 해주는 관계, 나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으면서도 침범당하지 않는 관계. 타인을 향해 창을 열되, 내면의 문까지 허물지는 말아야 한다. 경계는 곧 존재의 선이다. 오늘도 자신을 잃지 않고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경계를 세워야 한다.


한그루의 밤, 라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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