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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이카루스를 위한 애도

대붕은 태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카루스를 위한 애도(캔버스에 유채, 182.9*155.6). 영국화가 허버트 드레이퍼(Herbert Draper, 1863~1920)의 작품이다. ‘영국 국립미술관 테이트 명작전-누드(2017, 소마미술관)’전을 보러 갔을 때, 모두들 로댕의 하얀 대리석 조각 ‘키스’에 열광할 때 나는 이 작품 앞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을 못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에 버금가는 아테네의 최고 영웅이 테세우스다. 테세우스는 당시 해양 강국인 크레타 섬에 제물로 바쳐지는 젊은 남녀 각각 일곱 명씩을 구하러 떠난다. 크레타 섬의 ‘미궁’으로 들어간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황소머리의 괴물)를 죽이고 제물로 바쳐진 젊은 남녀들을 데리고 탈출한다. 


  화가 난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들어가면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하는 ‘미궁’의 설계자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루스를 크레타 섬의 높은 탑에 가두어버린다.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는 크레타 섬을 탈출하기 위해 새들의 깃털을 모아 밀랍으로 거대한 날개를 만든다. 마침내 탈출하는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밀랍이 녹을 수 있으니 절대 하늘 높이, 태양 가까이 날지 말라고 당부를 한다. 그러나 높이 날수록 세상을 더 많이 볼 수 있음을 안 이카루스는 더 높이, 더 높이 날아오른다. 결국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이카루스는 추락하고 만다.



  내가 아는 신화는 여기까지다. 추락한 이카루스가 어떤 형상이었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이카루스를 위한 애도’라는 대작 앞에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본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 등 거장들의 누드 작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양열에 검게 탄 이카루스가 바다요정 세 명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림이다. 비파를 든 바다요정의 표정은 비통하다. 물론 그 요정들은 모두 누드다. 그러했으니 ‘누드전’에 전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시선은 요정들의 누드가 아니라, 하늘을 높이 날다 추락한 이카루스의 주검에 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독주를 마셨다. 세포가 쌀알처럼 곤두서서 잠들 수 없었다. 혼자 이카루스를 위한 애도를 했다. 며칠이고 우울했다.


  불현듯 이 그림이 생각난 건 장자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단순 노동인 설거지나 빨래를 널 때면 유튜브를 라디오처럼 들으며 집안일을 한다. 어느 날, 어느 철학자가 장자의 대붕이야기를 했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둘레의 수치는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은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 양쪽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그 새는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바다로 여행하려고 마음먹었다.(중략) 메추라기가 대붕이 나는 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저 놈은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나는 뛰어서 위로 날며, 수십 길에 이르기 전에 숲 풀 사이에서 날개를 퍼덕거린다. 그것이 우리가 날 수 있는 가장 높은 것인데, 그는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 장자 내편 ‘소요유’ 중

  소요유(逍遙遊)란 세속적인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것을 뜻한다. 유유자적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을 말한다. 그 철학자는 그저 준비한 피피티를 천천히 읽었을 뿐인데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가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올라 왔다. 그저 건성건성 듣고 있었는데 말이다. ‘저 놈은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여기서. 나는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장자는 ‘조건적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붕은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바다로 여행을 꿈꾸었다. 바다가 움직인다는 건 태풍을 말한다. 날개가 수 천리인 대붕은 거대한 바람, 태풍이 와야지만 자유롭게 날 수 있다. 그러니 태풍이라는 악조건이 있어야지 자유를 향해, 자신의 꿈을 향해 날 수 있다는 말이다. 메추라기의 손바닥만 한 자유를 벗어나야지만 대붕처럼 구만리 하늘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악조건인 태풍이 오지 않으면 대붕은 꿈을 펼칠 수 없다. 


  또한 물고기 곤은 어떤 꿈을 꾸었으며, 어떤 엄청난 악조건을 뛰어 넘어 새가 되었을까. 그렇다면 악조건은 축복이 아닌가. 메추라기가 대붕의 꿈을 어찌 알겠는가.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이카루스의 비애가 생각났고, 허버트 드레이퍼의 ‘이카루스를 위한 애도’ 명작이 떠올랐다. 이카루스는 비록 추락했지만, 태양열에 밀랍이 녹을 때까지 높이 날아올랐지 않은가. 그는 새들의 깃털을 모아 거대한 날개를 만드는 악조건을 감수했고, 밀랍이 녹을지도 모르지만 꿈을 향해 날개 짓을 했다. 그러니 그는 실패한 게 아니다. 비록 바다에 추락했지만 크레타 섬을 탈출하는 데는 성공하지 않았는가. 그가 하늘을 날아 크레타 섬을 탈출할 꿈을 꾸지 않았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높은 탑에 갇혀 살았을 것이다. 그는 꿈을 향해 날아올랐고, 또한 높이 날아올랐다. 꿈을 행(行)하다 최후를 맞이한 이카루스의 죽음은 거룩하고 장엄하다. 하여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주검은 안식(安息)을 얻은 듯 평온했다. 


  그는 어쩜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은 삶의 고통을 멈추게 한다. 따라서 안락한 삶에 안주한 사람이거나,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음이 두려울지 모른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만이 거대한 날개를 만들고, 다들 무서워하는 태풍이 오기를 기다린다. 


  나는 아직도 물고기 곤인가. 곤은 얼마나 힘든 고난을 겪고 겪어, 새가 되었을까. 대학 일학년 때부터 소설을 썼고, 어느 중앙 문예지에 중편소설이 당선되는 바람에 문학이라는 올무에 한 발이 물렸다. 올무에 한 발이 물렸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 나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수많은 밤을 밀랍으로 새의 깃털을 붙여 날개를 만드는 고행(苦行)을 했다. 그래서, 그러니 물고기에서 새가 되긴 했다. 그러나 그 새는 매번 거친 바람(고난)을 타야지만 조금 날 수 있었다. 애초에 새가 되길 꿈꾸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비바람을 맞으며 오랜 세월 날개 짓을 하다 보니, 근육도 생기고 날개도 조금씩 자라 웬만한 바람에는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대붕이 되지 못한 새는 문득문득 태풍이 다가올까 봐 두렵다. 나는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진정한 대붕은 태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따뜻한 남쪽바다로 데려다 줄 바람이라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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