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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사자 혹은 원숭이

나는 사자인가, 원숭이인가

   - 고흐의 말이 다 진실은 아님. 프레임에 갇히는 게 더 문제라고 생각함.

  며칠째 산책을 할 때마다 A가 보낸 톡 메시지가 마음 한 귀퉁이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전말(顚末)은 이렇다.


  서울에서 살은 지 40년이 되지만 경상도 사투리가 전혀 바뀌지 않은 나의 말투 때문이다. 서울에서 수십 년 산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말을 쓰려고 노력한다. 특히 스튜어디스를 한 친구는 내 말투를 보고 나무라기까지 했다. 교육수준 떨어져 보인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가식이나 내숭이나 위선적인 언행을 하기에는 역부족인 나는 생긴대로 살아가고 있다. 나이 들면서 친구들은 내 사투리 섞인 말투를 재미있어 했다. 필이 꽂히면 몇 시간이고 혼자 유쾌하게 떠들기도 한다.


  그러다 A가 톡으로 내게 유튜브를 해보라고 했다. 그 말투로 사주풀이도 하고, 문학 얘기도 하고, 책 소개도 하고, 인생 애기도 하면 금세 조회 수 10만은 될 거라는 것이다. 농담으로 하는 말인가 했는데, A가 진지하게 개성 있고 차별화가 확실하니 정말 해보라고 푸시 했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다. 옛날에도 두어 번 들었지만, 일단 유튜브의 반은 공해라고 생각하는 주의이며, 다음은 그럴 만한 재능이 내겐 없다.


  - 사자는 원숭이 짓을 하지 않는다. -고흐-

  궁여지책으로 퍼뜩 생각난 말이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문장이었다. 그러자 A가 보낸 답장 메시지가 ‘고흐의 말이 다 진실은 아님. 프레임에 갇히는 게 더 문제라고 생각함.’ 이었다. 나는 뜻이 없으니 길이 없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그 만한 재능이 내겐 없다는 말로 대충 마무리 했다.


  그러나 며칠 째 A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A는, 사자는 원숭이 짓을 하지 않는다는 프레임에 갇힌 걸 말한 걸까. 그러니까 사자도 배가 고프면 원숭이처럼 바나나를 따 먹어야지, 사자라고 원숭이 짓을 하지 않는다는 프레임에 갇힘을 말한 걸까. 아니면 유튜브의 반은 원숭이 짓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내 생각을 꼬집을 걸까. 아니면 사자도 아니면서 사자인척 말한 내가 살짝 빈정 상해서 그랬을까. 그러나 나는 A가 ‘고흐의 말이 다 진실은 아님’이라는 말에 꽂혀 있었다.


  ‘사자는 원숭이 짓을 하지 않는다’, 는 고흐의 말은 진실이다. 사자는 사자이고, 원숭이는 원숭이다. 다시 말해 사자는 육식동물이고 원숭이는 잡식동물이다. 사자는 사자 짓을 하고 원숭이는 원숭이 짓을 한다. 사자는 굶어 죽을지언정 바나나를 따 먹지 않는다. 사자는 사자일 뿐 프레임에 갇힌 게 아니다. 또한 사자가 바나나를 먹지 않는 건 팩트일 뿐, 원숭이를 비하한 게 아니다. 하여, 고흐의 말은 진실이다.


  그런데 나는 왜 고흐가 굶어 죽은 것 같을까?  

  

'난 항상 내가 어딘가를 향하는 나그네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삶이 끝날 즈음엔 내 생각이 틀렸음이 밝혀지겠지. 그때가 되면 난 그림은 물론이고 모든 것들이 단지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거야.'


  동생 테오에게 쓴 고흐의 편지 글 중 일부다. 비범한 천재의 가난과 고독이 느껴져 가슴이 저릿해온다. ‘어딘가를 향하는 나그네 같다’는 말은 예술가는 ‘지상의 별을 찾아 떠도는 순례자 같다’고 어느 책 작가의 말에서 한 내 생각과 비슷하다. 우리는 어쩜 허무를 아는데 일생을 바치는지 모른다.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이 다 틀렸음이 밝혀지고, ‘모든 것들이 단지 꿈에 불과하다’ 는 사실도 어렴풋이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깨달음도 자신의 꿈이 있는 살리에르 쯤은 돼야 괴롭게 인식하게 된다. 그냥 막 사는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바라보며 살리에르가 왜 괴로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범한 영혼들이 ‘어딘가를 향하는 것’은 허무가 아니다. 그들은 후대의 영혼을 위무하고, 용기를 주고, 인간이 왜 인간인지 증명하는 위대한 선구자들이다.


  예술이 아니면 인간은 한발작도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어느 철학자의 말이다. 비트켄슈타인은 ‘인간은 말 할 수없는 것은 침묵하라. 말로 할 수 없는 건 표현해’ 낼 뿐이라고 했다. 여기서 ‘표현’이란 예술이다. 인간이, 범부들이 감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엄두도 내지 못할 가난과 고독을 견디며, ‘어딘가를 향해’ 가며, 그들은 표현해내는 것이다. 그 표현을 통해 우리는 밖으로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가를 존경한다. 고흐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말할 수 있다. 사자는 원숭이 짓을 하지 않는다고. 내가 할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표현해 내는 자’들은 자신이 사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고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며 오랜 침묵을 견딜 것이다. 심연에서 돌순처럼 천천히 자라는 ‘표현’을 기다리며.


  - 원숭이는 사자 짓을 하지 않는다.

  바나나를 배불리 먹은 한 원숭이는 그리 말할 것이다. 저 언덕 위에 사흘을 굶고 엎드려 있는 사자가 불쌍하기 짝이 없다는 투로 말이다. 언제부턴가 세상은 원숭이 왕국이 되었다.  원숭이 왕국에도 사자는 산다. 배경으로.


  I'm lion or monkey, this is question(나는 사자인가 원숭이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순간, 호구지책이 아니면 이 짓을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짓이란 욕망덩어리인 저급한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의 사주를 풀어서 상담하는 일이다. 사주가 아무리 좋아도 욕심이 가득한 사람은 세상이 불평불만으로만 보인다. 내가 아는 어느 검사는 매우 훌륭한 사주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는커녕, 늘 다른 이들 보다 빨리 혹은 더 좋은 보직으로 가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욕을 해대면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는 요정 메아리가 듣고 반드시 그에게 되돌려 준다. 좋은 운인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자들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내가 세상에 얼마나 자비를 베풀었는지. 세상에 베푼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세상이 자신에게 내 놓기만 하라는 심보는 도독의 심보와 같다.


  반면 분명 힘든 사주인데도 생글생글 웃으며, ‘다들 힘들게 살잖아요.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라고 말하는 긍정적인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늘 자신보다 힘든 이들이 눈에 보이고 가슴에는 사랑과 자비와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순해지면서 가슴 한 곳에 뭉쳐있던 얼음덩이가 스르르 녹아내림을 느낀다.


  나 혼자의 삶이었다면 사자 짓을 하며 살 수도 있겠는데, 스스로 맺은 인연들이 있어 원숭이 짓도 하며 산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 속에 윤리적 임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40년, 30년, 20년, 10년, 심지어 어젠 5년 쯤 된 어느 여자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늘 의뢰인의 편이다. 불륜을 해도 그녀편이고, 남의 남편 등을 쳐도 그녀 편이고, 딸을 창녀처럼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에게 미는 여자의 편이었다. 상담자의 기본자세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그 다음이 고통의 방편을 간명지를 보며 설명해 준다. 고통을 덜 수 있는 방편은 딱 한 가지뿐이다. 욕망과의 거리두기다. 마음의 방향을 조금 바꾸는 일이다. 처음엔 모두 잘 알아듣고 평온한 얼굴로 돌아간다. 그러나 하루 밤도 지나지 않아 욕망과 탐욕 덩어리는 산사태처럼 그들을 덮쳐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게 한다. 지장보살도 해결할 수 없을 욕심으로 가득한 마음들을 나 같은 원숭이가 감히 어찌 구제한단 말인가. 어느 순간 윤리적 임계점에 도달하면 나는 그들의 번호를 차단했다.


  샤워를 하다 문득 외과 의사들이 생각났다. 의사들은 우리 몸의 온갖 오물을 처리하며 수술 하지 않는가. 그럼 나는 지금 직무유기를 하고 있단 말인가. 물론 나는 외과의사는 아니지만 탐욕에 빠져 고통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치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내게 온갖 번뇌 망상들을 쏟아내곤 편안해 한다. 내가 의사보다 나은 게 뭔가, 라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워졌다. 불교의 모든 경전이 자비로 걸어가는 긴 계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눈물이 났다. 차단했던 번호를 다시 해제했다.


  고흐의 말이 다 진실이 아니다, 프레임에 갇히는 게 더 문제라고 한 A의 말은 80년대 이데올로기에 갇혀 내편 네편을 강요하는 위정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나는 사자인가, 원숭이인가. 글쟁이의 삶은 사자이고, 역학자의 삶은 원숭이다. 내 속에 사자와 원숭이가 공존한다. 그러나 원숭이가 사자를 먹여 살린다. 대신 사자는 내 영혼을 지킨다.


  Thank you mon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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