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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시네리뷰]이니셰린의 밴시

에술가와 범부, 예술가도 범부에겐 폭력이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마틴 맥도나 감독, 2023)’는 우정이라는 당의정을 입힌 전쟁(아일랜드 내전) 영화이며, 서로 다른 욕망을 지닌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 예술가의 욕망과 범부의 욕망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영화다.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죽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썸뜩하게 싸운다. 이 영화의 장르를 코미디로 분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니셰린은 아일랜드의 외딴 섬마을이다. 밴시는 유령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죽음 혹은 비애 혹은 슬픔으로 의역하고 싶다. ‘이니셰린의 비애’이라고 하면 이 영화의 주제와 딱 맞아 떨어진다. 이니셰린을 ‘지구’로 대입해도 괜찮다. ‘지구의 비애’.


  유한한 생명을 가진, 신념이 다른, 미칠 것처럼 지루한 삶을 견디는 방식이 서로 다른 인간들의 비애 혹은 슬픔을 보여준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의도 따윈 필요 없다. 모든 창작물의 감상은 관객의 몫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여동생 시오반과 소를 키우며 사는 파우릭(콜린 파렐)과 작곡가 콜름(브렌단 글리슨)은 매일매일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친구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절친이다. 그런데 어느 날 콜름이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이유를 알고 싶은 파우릭은 끈질기게 콜름을 찾아간다.


  - 남은 인생을 사색하고 작곡하며 살 생각이야. 자네의 한심한 얘기나 듣고 있긴 싫어.

  콜름이 이렇게 말하지만 파우릭은 알아듣지 못한다. 파우릭은 지루한 삶을 견딜 수 있는 건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한심한 이야기를 친구인 콜름과 수다를 떠는 일이라 생각하고, 작곡을 하는 콜름은 그런 일을 시간을 죽이는 일이라 생각한다.


  지루한 삶을 견디는 방식이 다른 둘은 전쟁을 시작한다. 콜름은 파우릭이 자신에게 말을 걸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 파우릭 집 앞에 던지고 간다. 그 손가락을 먹고 파우릭이 사랑하는 당나귀 제니가 죽는다. 파우릭은 급기야 콜름의 집을 방화한다. 그러나 콜름의 애견은 죽이지 않는다. 콜름의 애견을 죽이지 않은 건 신이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긴 ‘희망’ 같다. 화해할 수 있는 희망. 콜름도 창문으로 탈출해서 목숨을 건진다. 콜름은 파우릭의 당나귀 제니가 죽게 된 걸 사과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산송장’이란 별명을 가진 노파가 내려다보고 있는 바닷가. 멀리 본토에서 들리는 대포소리. 아일랜드 내전(1923)은 끝나지 않았다. 영국에 친화적인 북아일랜드를 싫어하는 IRA과의 전쟁이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그들이 왜 싸우는지 모른다. ‘산송장’을 중심으로 좌우로 멀어지는 파우릭과 콜름. 라스트 신이다.


  인간은 왜 전쟁을 할까. 예술가 콜름은 한줌의 평온을 원하고. 범부인 파우릭은 다정한 수다를 원한다. 콜름은 수다가 지루하고, 파우릭은 평온이 지루하다. 인간은 지루함을 견딜 수 없다. 결국 지루함을 견딜 수 없는 인간들은 전쟁을 한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못 찾으면 자살한다. 사오빈에게 구애를 했다가 거절당한 경찰 아들은 자살한다. 막연히 죽기만을 기다리는, 혼자만 만족하는 삶을 살거냐고 콜름이 사오빈에게 말한다. 사오빈은 그 말을 들은 후 자신의 꿈을 찾아 본토의 도서관 사서로 취직해서 섬을 떠난다.


  파오릭은 음악이나 그림이나 시를 쓰는 예술가는 삶이 지루하지 않다고 말하는 콜름을 이해 할 수 없다. 꿈을 찾아 떠나는 여동생 사오빈도 이해 못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자살하는 경찰 아들도 아마 이해 못했을 것이다.


  범부의 시각으로 영화를 끌고 가는 게 신선하다. 예술이 뭔지 모르는 사람에겐 예술도 폭력이 된다는 걸 보여준다. 예술인과 일반인, 소통이 되지 않으면 서로에게 폭력이 된다. 이 지점에서 나는 경탄했다. 언제나 일반인들이 나를 괴롭히는 줄 알았다. 대학원까지 공부를 했으니, 거의 20년을 공동체 생활을 한 거다. 그러나 나는 늘 외톨이였다. 그러나 혼자 늘 충만했다. 외롭다는 생각을 그닥 많이 하진 않았다. 내 글쓰기가 충족되지 않을 때 조금 외롭고 쓸쓸하긴 했다. 나를 이해 못하는 아이들은 눈을 흘기며 수군거렸다. 그들이 내게 무언의 폭력을 가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에, 나란 존재 자체도 그들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었구나 싶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빛나는 통찰에 기립박수 보낸다. 여태 이런 해석의 영화는 본 적이 없다. 모든 영화감독은 예술가의 편이다. 예술을 모르는 일반인이 예술가에게 돌을 던지는 영화는 흔하다.


  - 예술은 우릴 미치게 하지. 우린 약쟁이야. 예술은 우리의 마약이고. 사자 입에 머리를 넣는 건 용기지. 사자가 내 머리를 먹지 않게 하는 게 예술이다. 예술이 하늘의 왕관과 땅의 월계관을 줄 테지. 그러나 네 가슴을 찢어놓고 널 외롭게 할 거다. 넌 네 가족들의 수치가 되고 사막으로 추방당한 집시가 될게다. 예술은 장난이 아니야. 사자의 입처럼 위험하지. 네 머릴 물어뜯을 거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 영화 ‘파벨만스(2023)’에 나오는 대사다. 우리가 마약쟁이를 이해 못하듯 범부들이 예술가를 이해하긴 쉽지 않다. 오히려 표현해낸 예술은 이해할 수 있어도 예술가를 이해하기란 만만치 않다. 파우릭은 음악하는 사람들과만 교류하는 콜름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긴다. 누군가와 소통하지 못하면 인간은 폭력적이 된다. 묻지마 폭력도 이렇게 일어난다.


  콜름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하는 데도 끝임 없이 말을 거는 파우릭과는 소통불능이다. 그는 바이올린을 켜야 하는 손가락을 파우릭이 말을 걸 때마다 하나씩 잘라서 파우릭의 집 앞에 던져 놓는다. 무서운 자해다.


  이 영화를 보며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생각났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린다. 그들에겐 ‘고도’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들에겐 공통된 희망이 있기에 50년 가까이 싸우지 않고, 고도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위대함은 부조리한 삶에 ‘고도’라는 희망을 창조해 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고도를 기다리며 산다.


  그러나 이니셰린의 두 사람은 이념이 다르다. 신념이 다른 사람들은 전쟁을 한다.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마틴 맥도나 감독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들에겐 공통된 희망이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감독은 ‘쓰리빌보드(2018)’에서도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동양적 질문은 한다.


  아직 살날이 너무 많이 남아 벌써부터 지루하다. 지루함과의 투쟁. 글쟁이는 문장이 무기다. 무기를 벼르고 별러 스치는 바람에도 핏방울이 맺히도록 하리라. 이런 내가 다른 이에겐 무언의 폭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내버려두기 바란다. 지루하다 죽도록.  


  역사학자 아널드 J. 토인비가 20세기 이후 가장 특이한 점은 부처의 가르침(자비)이 서양으로 유입된 것이라고 했다. 자비의 반대어는 무자비다. 예수가 이 땅에 온지도 2000년이 넘었다. 공자 노자 부처 예수... 인류의 성현들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는 아직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집착을 놓지 못하고 무자비하게 싸운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비애, 인간이라는 종족의 슬픔이다. 이 슬픔이 지루함을 견디게  하는 힘인가.  


  이 영화는 전쟁을 풍자한 잔혹하고도 통렬한 블랙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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