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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시네리뷰]The Hours

자신의 삶과 자유를 찾아 인생 전부를 거는 여자들의 이야기

   영화 디 아워즈(The Hours)는 2003년 스티브 달드리 감독 작품이다. 1999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소설이 원작이다. 30년, 50년의 시차로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세 여인의 하루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만든 미국영화다. 올해는 2024년. 20년 전에 이 영화를 봤던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 여자의 일생을 단 하루를 통해 보여준다. 하루에, 단 하루에 그녀의 일생이 담겨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며 떠올린 이 생각이 이 영화를 하나로 꿰고 있다.  


  1923년.

  영국의 리치먼드에 살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분)는 깊은 우울증을 앓고 있다. 자살시도를 두 번이나 한 그녀를 위해 런던 교외인 리치먼드로 이사했다. 버지니아를 사랑하는 남편 레너드는 자신의 삶을 그녀에게 맞추며 산다. 소설을 쓰는 버지니아의 머릿속에는 온통 소설 속의 생각들로 가득하다.

  - 그녀는 죽었다. 그녀는 죽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살 할 것이다.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일로 자살할 것이다.

  너무나 이해가 가는 장면이다. 나도 소설을 쓸 때면 언제나 소설의 프로세스(process) 속에 드리븐(drien)되어 있어, 꽃이 피는 줄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분명 겨울이었는데, 소설을 끝내고 밖에 나오니 온 천지가 꽃 대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이 갇혔다고 생각한다. 런던에 있든 리치먼드에 있든 갑갑하기는 마찬가지다. 발작과 감정기복과 기절과 환청으로 인생을 빼앗겨서 살고 싶지도 않은 시골에서, 살고 싶지도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버지니아의 언니가 세 아이들을 데리고 티타임을 가지러 런던에서 온다. 아이들은 죽은 새을 발견하고 무덤을 만들어준다고 법석을 떤다.

  조카 :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죠?

  버지니아 : 왔던 곳으로 돌아가.

  조카 : 어디서 왔는지 기억 안 나요.

  버지니아 : 나도 그래.

  조카 : 아주 작아요. 하지만 아주 평온해요.

  버지니아는 노란 장미로 장식한 새의 주검 옆에 누워 본다. 언니가 세 아이를 데리고 런던으로 떠날 때, 버지니아는 언니에게 입맞춤을 한다. 이례적인 장면이다.

  - 난 탈출할 수 있을까?

  아주 메타포가 강한 말이다. 어리둥절한 언니는 그럴거라고 답하고 떠난다.

  어느 날 아침 버지니아는 더 이상 사랑하는 남편 레너드의 인생을 망칠 수 없다는 편지를 남기고 주머니에 돌을 넣고 강물로 들어간다.

  ‘레너드, 우리가 함께 한 세월 그 세월은 영원할 거야. 영원한 그 사랑, 영원한 그 시간.’  

  1951년.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로라 브라운(줄리언 무어 분). 친절하고 다정한 남편과 아들 리처드와 둘째를 임신한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다.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처럼 겉으로는 너무나 행복한 생활이지만 내면에는 끝없는 갈등에 시달린다. 자신의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찾고 싶다.

  이웃에 사는 키티가 방문해서 아이가 있는 로라를 부러워하며 자신은 병원에 가야 하니 강아지 밥을 좀 주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키티가 방문하자 거울을 보며 모습을 가다듬는다. 키티가 아프다는 말에 로라는 그녀에게 입맞춤을 한다. 로라는 키티가 사라질까봐 두렵다. 그리고 남편이 침대에서 오래 기다리게 한다. 그녀는 다정한 남편과의 생활이 죽음과 같다. 이런 디테일한 장면에서 나는 눈치 채기 시작했다. 그녀의 정체성에 대해.

  어느 날 아침, 로라는 남편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다 말고 아들 리처드를 이웃에 맡기고 약을 챙겨 호텔로 간다. 아들 리처드는 본능적으로 분리불안을 느끼며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울부짖는다. 로라는 냉혹하게 차를 몰고 떠난다.

  ‘의미가 있었을까. 그녀는 본드가로 가며 자문한다. 자신의 삶을 필연적으로 완전히 끝내는 게 의미 있는 행동일까? 자신이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감에 그녀는 억울했을까? 죽음이 삶을 완전히 끝냈음에 위로를 받진 않았을까? 죽는 것도 가능하다. 죽을 수 있다. 그녀는 죽을 수 있다.’

  로라는 버지니아의 책을 읽고 용기를 낸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한다. 둘째 아이를 낳은 후 가정을 떠나 캐나다에서 사서로 일하며 일생을 보낸다.


  2001년.

  뉴욕.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클라리사(메릴 스트립 분). 출판사 편집자인 그녀는 그녀를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처음으로 불러준 옛 연인 리처드를 돌보며 지낸다. 리처드는 소설가이고 에이즈에 걸린 환자로 그녀의 집 근처에 산다. 그는 가정을 버리고 떠난 로라 브라운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있다. 사람은 대개 어린 시절의 결핍에 평생 매달리며 살게 된다. 그는 성소수자로 첫사랑 클라리사를 떠나 루이스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댈리웨이 부인은 꽃을 직접 사와야겠다고 말했다.’

  그 유명한 소설 ‘댈리웨이 부인’의 첫 문장이다.

  - 샐리. 꽃을 직접 사와야겠어.

  리처드가 문학상을 받는 어느 날 아침, 클라리사는 같은 침대를 쓰는 여자 샐리에게 말한다. 그녀 또한 성소수자로 나온다. 리처드와의 첫사랑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면서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딸을 낳아 키웠으며, 지금은 샐리라는 여자와 산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처럼 클라리사는 꽃을 사러 간다. 그 날 저녁 리처드가 문학상을 받는 기념 파티를 위해. 꽃을 사오고 요리를 하고 있는데, 리처드의 옛 동성애인 루이스가 찾아온다. 클라리사는 리처드와의 어느 날 아침을 떠올린다. 그녀에게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렀던 그 아침.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 순간에 클라리사는 갇혀 있다. 행복이 시작이구나 생각하는데, 루이스라는 남자가 나타나서 리처드를 빼앗아 간다.

  - 리처드를 떠난 날 유럽을 횡단하며, 여러 해만에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어요.

  루이스의 고백이다. 현재는 제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

  3시 반 쯤,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옷 입는 걸 도와주러 그의 아파트로 간다.

  - 정말 정신이 맑았다면 난 깊디깊은 어둠 속에서 홀로 허우적대고 있다고... 이 정적 속에서 행복해지고 싶어... 댈러웨이 부인, 너 때문에 목숨을 부지해 왔어. 이젠 놔줘.

  리처드는 창문으로 뛰어내린다.

  파티는 시작도 못하고 끝이 났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로라 브라운이 찾아온다.

  - 죽음 속에서 난 삶을 선택했어요.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담담히 말한다.


  2024년.

  서울. 매일 밤 선잠 속에서 내일은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빗소리를 들으며 뒤척인다. 밤마다 가혹하게 퍼붓는 장마다. 매년 기록을 갱신하는 혹독하고 난폭한 여름. 폭우와 폭염과 폭주와 살상과 흉흉한 루머와 마타도어와 파라독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열차게 이 무덥고 불안한 여름을 채우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영화를 본다.

  이렇게 영화 리뷰의 스토리를 길게 써 본 적이 없다.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 아니다. 난해하다. 도대체 이 감독은 무엇을 말하려하는가. 끝까지 다보고 나니 한 줄로 꿰어지는 게 있다.

  디 아워즈는 여성의 존재와 정체성에 관한 영화다. 소설 속의 댈러웨이 부인이나,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나, 1951년의 로라 브라운이나, 2001년의 클라리사나 모두 여성들의 존재와 정체성을 다루고 있다. 모두 자신의 삶을 살고 싶은 여자들의 이야기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준다.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은 수많은 갈등 끝에 가정이라는 테두리에 안주하고,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는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같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우울증에 갇혀버리는 삶을 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951년의 로라 브라운은 죽음 같은 남편과의 삶을 버리고 떠남으로서 댈러웨이 부인이나 버지니아 울프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2001년의 클라리사는 그 모든 사회적 통념을 깨부수고 산다. 첫사랑 남자 리처드를 가슴에 안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 키웠으며, 동성애인 샐리와 산다.


  2024년 서울에서 이 영화를 보는 소설가 정영희는 성소수자는 아니지만, 수많은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과 집착이 뒤엉킨 아픈 사랑과 죽을 만큼 아픈 이별과, 슬픈 사랑과 죽을 만큼 슬픈 이별을 다 통과하며, 죽지 않고 살아 남아 글을 쓰서, 책을 열권 쯤 출간했다. 하여, 간신히 외롭지 않고, 간신히 부럽지 않고, 간신히 평화롭고 자유롭다. 현재는 혼자 애견과 산다. 2001년의 클라리사 보다 한걸음 쯤 더 나아간 삶인가? 다행이 백 년 전 버지니아 울프처럼 내 영혼은 갇혀  있진 않다.

  자신의 삶과 자유를 찾아 인생 전부를 거는 모든 여성들에게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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