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소설가 정영희의 시네리뷰]러브 어페어

소유함이 중요한 게 아니다. 소유 후에도 계속 상대를 원하느냐가 중요하지

  러브 어페어(love affair). 직역을 하자면 ‘연애 사건’ 쯤 되겠다. 씨네뮤직 예고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에 끌려 오래전에 본 ‘러브 어페어’를 소환했다. 1995년 개봉작이고, 나는 그 다음 해 비디오테이프로 본 기억이 난다. 웨린 비티 각본에 감독은 글렌 고든 카슨이다.

  명작이란 역시 긴 시간을 거치고도 여전히 인간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 위력이 있다. 두 남녀의 운명적인 사람을 그린 1957년 작을 리메이크 한 미국영화다. 리메이크해서 성공한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은퇴한 바람둥이 풋볼 스타 마이크 겜브릴(웨렌 비티분)은 돈 많은 토크 쇼 진행자인 방송계의 거목과 약혼을 발표해 연예계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출장차 가든 호주행 비행기 안에서 테리 맥케이(아네트 베닝 분)라는 여인을 만나 묘한 매력에 이끌린다. 바람둥이들은 언제나 새 여자를 만날 때마다 묘한 매력에 이끌렸다고 항변한다. 이래서 바람둥이들은 귀엽다. 테리 맥케이에게도 남자 친구(피어스 브로스넌 분)가 있었다.

  때마침 그들이 탄 비행기는 엔진고장으로 조그만 섬에 비상착륙하게 되고, 근해에 있던 러시아 여객선을 타고 호주로 향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사이 웨렌 비티는 고모가 타히티 섬에 살고 있다며 베닝를 유혹한다.  

  - 섬마다 고모가 사세요?

  TV뉴스로 그가 바람둥이인 걸 이미 아는 베닝이 묻는다. 그러나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사랑임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흔 살의 고모(캐스린 헵번 분) 집에 잠깐 머물면서 둘은 더욱 운명적인 사랑임을 직감한다. 

  두 사람은 헤어지면서 3개월 후에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 전망대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만약 나오지 않더라도 이유를 묻지 않기로 한다.

  그런데 느닷없는 장면에서 터지기 시작한 눈물은 뚜껑 열린 샴페인 같았다. 캐서린 헵번이 피아노를 치고 아네트 베닝이 허밍을 하고, 웨렌 비티가 두 여인을 바라보는 장면부터 예고 없이 터졌다. 아, 아직도 사랑을 믿는 마음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짧은 곱슬머리가 가장 잘 어울리는 여배우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잉그리드 버그만이다. 어린 날 그녀를 보며 저 헤어스타일을 꼭 해보고 싶었는데 여태 못해봤다. 그녀 다음으로 짧은 곱슬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배우는 아네트 베닝이다. 어쩜 둘 다 영화에서 사랑에 빠졌을 때의 눈빛과 옆모습의 아름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 눈에 반한 여인에게 빠졌을 때, 웨렌 비티만큼 저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남자배우는 단언컨대 없다. 클라크 케이블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비안 리를 바라볼 때의 눈빛도 숨을 멎게 하는 데가 있고, ‘가을의 전설’에서 브래드 피트가 줄리아 오몬드를 바라볼 때의 강렬한 눈빛도 있지만, 눈빛만큼은 웨렌 비티가 탑이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가 얼마나 로맨틱하게 생겼는지 아는 배우다. 그 옴팍하면서 지적이고 작으면서도 깊은 눈빛 연기가 이 영화에 안성맞춤인 걸, 각색을 하며 그는 알았을 것이다. 웨렌 비티의 다른 영화는 생각나지 않는다. 한 때 저 영화를 보고 몇 날 며칠 동안 사랑의 ‘떨림’을 가라앉히기 위해 오래오래 걸었던 기억이 난다. 

  큰 키에 짧은 곱슬머리를 하고 성큼성큼 걷는 아네트 베닝의 모습은 신화 속 여인 같다.  

  - 말도 일부일처제가 아니고, 닭도 일부일처제가 아니고, 오리도 일부일처제가 아니란다. 그러나 백조는 일부일처제란다. 

  화가가 꿈이었던 바람둥이 비티가 자신이 백조인데 오리인 줄 착각하고 있다고 고모인 캐스린이 말한다. 몇 장면 나오지도 않는 늙은 ‘캐스린 헵번’의 존재감은 또한 대단하다. 젊고 예쁜 아네트 베닝에 전혀 밀리지 않는 늙은 여배우의 지적인 모습. 파킨슨병으로 머리를 살짝 흔들며 말하는 등 굽고 작아진 노년의 캐스린 헵번은 내 속에 갇혀 이미 미이라가 된 줄 알았던 ‘인간애’를 벌떡 일으켜 세워 눈물샘을 길어 올렸다. 아직도 영화를 보고 이렇게 울 수도 있구나, 싶었다. 

  다들 백조처럼 일부일처제로 살기를 바란다. 힘든 일이다. 쉽지 않으니, 아름다운 거다. 일부일처제가 쉬우면 왜 결혼제도로 묶어 두겠는가. 쉽지는 않지만 가장 인간답고 제도적으로 통제하기 쉬운 형태이니, 인류는 그렇게 진화해 온 거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그렇고, 영국의 존슨 총리도 그렇고, 모두 젊고 예쁜 세 번째 여자와 산다. 모두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려 고군분투(孤軍奮鬪) 중인 것이다. 일부다처제란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사는 제도이다. 그런 나라가 아직도 일부 남아 있기는 하나, 선진 문명사회에서는 대부분 일부일처제에 순응하기 위해 수도 없이 이혼과 결혼을 반복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 소유함이 중요한 게 아니다. 소유 후에도 계속 상대를 원하느냐가 중요하지.

  캐스린 헵번이 아네트 베닝에게 말한다. 

  사랑의 속성은 소유다. 소유 후, 말하자면 결혼 후에도 서로를 계속 원하는 배우자를 만나려면 전생에 남의 목숨을 여러 번은 구하는 공덕을 쌓아야 가능할 것이다. 바람둥이 웨렌 비티는 운명적인 여인을 만났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고, 아네트 베닝도 시간이 갈수록 그가 자신의 운명적인 남자임을 깨닫고, 그날만을 기다린다. 

  아무튼 웨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이 만나기로 한 날, 베닝은 교통사고로 휠체어 신세가 된다. 내용을 뻔히 다 아는데도 어쩜 이렇게 볼 때마다 가슴을 아리게 하는지. 웨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을 보고 있노라면, 배우들의 마스크 자체가 예술 작품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우여곡절 끝에 웨렌 비티는 아네트 베닝의 집을 찾아내어 방문하고, 그녀가 일어설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 당신이 그림을 다시 그린다면, 나는 다시 걸을 수 있을 거예요.

  매우 오글거리는 대사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다 버터가 듬뿍 들어간 케익 같다. 

  이 영화는 볼 때마다 다른 장면에서 울컥한다. 예전에는 웨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만 보이더니, 이번에 보니 나이가 들어도 지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캐스린 헵번’과 007의 바람둥이 ‘피어스 브로스넌’이 짝사랑으로 쓸쓸해 하는 낯선 모습이 보이고, 타히티 섬의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타히티 섬 가보기’를 버킷 리스터에 추가하고 싶어졌고, 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레꼬네(1928~2020)가 천재임을 다시 한번 확인 했다. 이 영화에 이 음악이 없다면, 러브 어페어는 실패작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예술 작품은 대개 언해피 엔딩(unhappy ending)으로 끝이 난다. 이유는 비극으로 끝나는 게 독자나 관객들의 가슴에 더 오래도록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브 어페어’는 해피 엔딩(happy ending)으로 끝나지만, 오래도록 관객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일부일처제를 수호하고 싶은 백조이길 꿈꾸니까.

  (얼마 전 그가 타계했다. 나를 만든 5할은 영화와 음악 혹은 영화 음악이고 그 반은 문학이다. 그의 추모 콘서트에 아들과 아들 여친과 다녀왔다. 엔니오 모레꼬네 추모 콘서트는 ‘내 청춘의 추모 콘서트’ 같았다. 강물처럼 흐르는 그의 영화 음악은 내 인생의 마디마디를 기억나게 했다. 잘 가라 내 청춘. 내 외롭던 청춘을 지배 했던 엔니오 모레꼬네의 위대한 영혼에 경배한다. 부디 영면하시길. 웨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은 실제로 결혼하여 아이 넷을 낳고 지금도 사랑하며 잘 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가 정영희의 시네리뷰]The Hour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