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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시네리뷰]소림사의 복수

인생은 촛불과 같고, 우리의 삶이란 소림사의 복수와 같다

  지인의 딸이 미국 유학을 가서 영문학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대학에서 영미문학과 교수가 되었다. 영미문학이라면 아주 오래 전 대학에서 한 학기 강의를 들은 게 다였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햄릿’ 한 대사 정도는 안다. To be or not to be, this is question.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 한 문장을 얼마나 오래도록 우려먹었던가. 지금도 갈등의 순간에는 어김없이 내 머리 속에서 울려 퍼진다.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맥베스의 이 대사도 삶이 지루할 때면 머릿속에서 개미떼처럼 기어 나온다. 

  미술학도이면서 전공 이외의 수업은 거의 문리대쪽 과목을 선택했다. 어느 날, 무슨 허영기가 발동했는지 ‘영미문학’을 선택했다. 고려대 영문학과를 나온, 목소리가 바리톤에 가까운 깡마른 노교수(老敎授)는 빈 파이프를 물었다 뗏다 하며, 아주 천천히, 연극대사를 외듯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읽어 내려갔다. 맥베스는 인간의 욕망이 가져오는 파멸에 관한 희곡이다.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Creeps in this petty pace from day to day...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이 더딘 걸음으로 하루 또 하루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어가서,

  우리의 어제들은 흙덩이 죽음에 달하는 

  어리석은 자들 앞에 비추리.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아!

  인생이란 걷는 그림자일 뿐

  무대 위를 잠깐 우쭐대며 오가다

  고스란히 잊혀지는 불쌍한 배우

  바보가 떠드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소리와 격정으로 가득하지만

  덧없는 이야기...

  나는 단박에 그 노교수의 팬이 되었다. 그 노교수의 연구실에 자주 놀러 갔다. 파이프 담배를 피웠으며 짙은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셨다. 문리대학장과도 친한 분이어서 학장실에도 들락거렸다. 생각하면 문학의 뜻을 가슴에 품은 참으로 겁 없고 맹랑한 스물 한 살의 처녀였다. 그 분들은 오십대 후반이었고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내가 문단에 등단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는 친필로 세로로 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정영희군에게’로 시작했다. 그 편지는 아마 어느 상자에 보관 돼 있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소설가를 아주 높이 평가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있다. 셰익스피어 이래로 새로운 것은 없다, 라는 말도 그때 들은 것 같다. 그분들은 이제 이 세상 분들이 아닐 것이다. 그때 이미 그분들은 인생이란 짧은 촛불과 같음을 아시지 않았을까.

  - 너의 삶을 살아라. 너의 재능을 낭비하지마라... 나는 너무나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한 번도 시도조차 못해보고 이렇게 내 인생을 낭비하고 말았다...

  그 말을 할 때 노교수의 메마른 눈빛에 물기가 어른거렸다. 그는 늘 창밖 어디 먼 곳을 바라보며 천천히 강의를 했다. 그 노교수는 영시(英詩)를 원어로 줄줄 외우곤 했다.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윌리엄 워즈워드의 ‘초원의 빛’ 중에서)

  내 눈에는 성공한 멋진 교수님으로만 비치는데, 그분은 내게 문학 얘기를 할 때만은 언제나 회한어린 눈빛이 되곤 했다.  

  인생이란 짧은 촛불과 같고, 덧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의 입을 통해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삶이란 ‘소림사의 복수’와 같다. 우연히 빌려 본 비디오테이프의 영화 제목이 ‘소림사의 복수’였다. 

  오래 전 비디오가게가 성업을 누리던 시절, 비디오가게 단골이었다. 빌려 보다 빌려 보다, 더 이상 그 가게에서는 빌려볼 만한 테이프가 없어 손가는 대로 고른 B급 중국영화가 ‘소림사의 복수’였다. (어쩌면 제목이 ‘낙양성의 복수’ 였는 지도 모르겠다. 워낙 무작위로 영화를 보던 시절이라.)

  소림사의 어느 고수가 숙적에 의해 일가족이 죽임을 당한다. 다행이 어떤 스님에 의해 그 고수의 어린 외아들은 목숨을 건진다. 어린 아들은 스님을 따라 깊은 산속에 들어가 20년  동안 집안의 원수를 갚기 위해 스님을 시봉하며 무예를 닦고 수도를 한다. 어린아이에서 소년으로,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는 과정을 심산유곡을 배경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어 보여 준다.

  드디어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한 제자를 어느 날 스승이 불러 말을 한다. 이제 넌 어느 누구도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무예를 익혔으니 하산하여라. 무림의 고수가 된 아들은 스승에게 큰절을 올리고 산을 내려간다. 많은 날을 한뎃잠을 자고 생식을 하며 내려가자니 그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봉두난발에 상거지 꼴이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복수심에 차 형형했다. 산 아래 첫 동네를 지나가는데 느닷없이 돌이 날아온다. 동네 수십 명의 조무래기들이 문둥이가 지나가는 줄 알고 돌팔매질을 한 것이다. 그는 그만 그 돌팔매질에 맞아 죽고 만다. 그리고 끝이었다.

  뭔가 잘못된 줄 알고 몇 번이나 다시 돌려 보았지만, 주인공은 그렇게 느닷없는 돌팔매에 어이없이 맞아 죽고 마는 게 끝이었다. 마치 이것이 인생이다, 하고 말하는 듯 했다. 감독이 누군지 주인공이 누군지 기억에 없다. 그러나 그 감독의 들리지 않는 웃음만은 비수처럼 뇌리에 박혀있다. 

  모든 인생이 다 그렇지만은 않다. 고수이면서 복수를 하고 장수(長壽)까지 하는 삶도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예술가로 은유하면 더욱 고개가 깊이 끄덕여진다. ‘예술가의 삶이란 소림사의 복수와 같다.’ 다시 정리하면 ‘인생은 촛불과 같고, 예술가의 삶은 소림사의 복수’와 같다.  

  그 옛날 나의 재능을 알아봐준 영문학자 노교수는 내게 ‘재능을 낭비하지 말고, 너의 삶을 살아라’고 했다. 그럼 정녕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는가? 단언컨대 난 매우 느리지만 나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슬픔도 외로움도 재산이란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슬픔과 외로움이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응시할 수 있을까. 존재의 아름다움은 삶의 외로움과 슬픔을 먹고 깊어진다.

  어느 날, 글은, 내 삶의 ‘소비’이자 ‘욕망’임을 알아차렸다. 그 소비와 욕망은 온몸으로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아주 느려서, 세심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그 흔적이 미미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또한 그 소비와 욕망은 삶의 쓴맛과 짠맛을 톡톡히 맛보게 한 후 조금 허락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삶의 복수란 무엇인가. 삶과의 진검승부란 무엇이란 말인가. 적어도 내게 있어 세속적인 부와 명예와 권력은 아니다. 예술가는 결코 이 생(生)에 복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생과 사, 선과 악, 성(聖)과 속(俗), 구원과 욕망으로 가득 찬, 이 삶의 뒷모습을 그저 가장 마지막까지 목도(目睹)하고 기록하는 자 일뿐이다.

  예술가는 혹은 우리 모두는, 영원히 비기(祕技)를 써먹어보지 못하고 떠나는 ‘소림사의 복수’, 주인공과 같다. 그 비기를 쓰려는 순간 느닷없이 날아온 돌팔매질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고수가 되어 하산하는 일은 미룰수록 좋을 것 같다. 

  인생은 촛불과 같고, 우리의 ‘삶이란, 소림사의 복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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