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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어느 소설가의 초상

일요일 오후의 나른한 하품/ 산수화의 여백 같은 삶이다

  어느 소설가는 K다. 이름을 밝힐 수도 있지만 그냥 이니셜 K라고 하기로 했다. K를 안지 40년이 된다. 그를 못 본지는 36년이나 된다. 다시 말해 K를 대학 때 보고 못 봤다는 말이다. 그는 내가 대학 일학년 때 ‘천마 문학상’에 120매짜리 단편소설 ‘코스모스’를 응모했을 때 심사를 했다. 물론 그도 학생이다. 겨우 나보다 한 살 많은.

  뭘 썼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 필시, 짝사랑에 관한 얘기였을 것이다. 그즈음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게 짝사랑이었으므로.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으니 썼을 것이다. 그렇게 토해내곤 한동안 잊고 지냈다. ‘유쾌한 배설물’을 오래 기억하지는 않는다. 대개 글쟁이들은.

  어느 늦은 가을이었다. 실기실 앞 잔디가 누렇게 변해 있었고, 남학생들이 따스한 양지에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던 계절이었다. 밖에 누가 찾아왔다고 했다. 나를? 누가 날 찾아온단 말인가. 실기실 밖에는 전혀 안면이 없는 남학생 두 명이 서 있었다. K와 H였다. 기억이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거나 혹은 스스로 재구성해서 기억하므로 혹여 사실과 다르더라도 어쩔 수 없다. 특히 나 같은 소설가들이 그러하다. 내 기억에 K는 연극하는 H와 같이 나를 찾아왔다.

  K는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H는 K보다 조금 더 왜소하고 작았다. K는 우뚝한 코에 눈까지 내려오는 ‘테리우스’ 머리를 하고 있었다. 눈은 삽화 속의 눈처럼 정지된 눈빛이었다.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눈빛인데 굳이 돌아보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는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는 ‘코스모스’라는 단편소설을 잘 읽었다고 했다. 물론 천마문학상에 당선되지는 않았다. 미대생이 소설을 써서 너무 궁금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곧바로 막걸리를 마시러 갔던가. 그랬을 것이다. 커피 마실 돈이면 막걸리 한 주전자를 마실 수 있었으니까.

  얼굴은 제법 살도 있고 턱도 로마제국 장군 ‘아그리파’처럼 튼실하게 생겼다. 그러나 몸은 형편없이 말라있었고, 손가락은 가늘고 하얬다. 저 손으로 노동은 못하겠구나 싶었다. K는 철학과에 다닌다고 했다. 나중에는 국문과로 전과해서 졸업한 걸로 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술꾼들이 많았다.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거나 혹은 연극을 하는 부류였다. 그들은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어쩐지 퇴폐적이고, 염세적이고, 종말론 자들이고, 말세주의자들이고, 세상과 불화하는 자들이고, 상처받은 자들이며, 영원히 표류하는 섬 같은 자들이며 그리고 그들은 가난했다. 안주는 파전 하나 시켜놓고 막걸리는 몇 주전자 째 마시는지 모른다. 아무도 안주를 덥석덥석 집어먹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K가 술 이외에 음식을 먹는 걸 별로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는 담배연기와 술만 먹었다.

  그러나 분명 나는 그런 그들에게서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가령 도덕주의자들 땅에서 영원히 추방당한 떠돌이들의 비애 같은 거 말이다. 가는 곳마다 슬픔만이 그들의 잔을 채우고, 그 슬픔을 마시고 한 순간 반짝이다 스러지는 이슬 같은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상처 받은 자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늦어도 11시 반에는 일어나서 택시를 타야 했다. 술값을 참 많이도 내 준거 같다. 그냥 자연스러웠다. 난 언제나 돈이 있었고 그들은 언제나 돈이 없었다. 차비까지 챙겨주고는 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삶과 문학과 사랑과 철학과 예술과 인생과 노래와 연극에 관해 얘기했을 것이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신동에 있는데 차비가 없어 대구 집으로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칠곡군에 있는 신동은 완행열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하는 면이었다. 나는 아버지 카메라 캐논을 어깨에 걸치고, 흰 남방에 청바지를 입고, 긴 머리를 흩날리며 동대구역에서 신동 가는 완행열차를 탔다. 여름이었다. 들판은 한창 자라는 벼들로 푸르렀다. 어쩜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행열차를 타 본 것 같다. 이미 새마을호 열차가 있던 시절이었다.

  신동역에는 K와 연극하는 H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들의 양손에는 ‘환희’ 담배 껍질을 나무젓가락에 붙여 만든 환영 깃발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환희’를 흔들며 나를 환영했다. 만원만 있으면 통닭 한 마리에 막걸리 여러 병을 먹을 수 있었다. 신동의 어느 정자에서 통닭과 막걸리를 사와 실컷 먹고 마셨다. 그러고도 대구 갈 기차표 값이 해결되었다. 그들은 나를 ‘구세주’라고 했다. 

  신동면은 서너 명의 술꾼 중에 누군가의 고향이었다. 고향인 친구가 신동면에 왔다고 못인지 저수지인지 모를 물을 구경시켜 주었다. 물은 언덕을 올라가야 있었다. K는 나를 언덕에 앉아 있게 하고 내가 가져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멀리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살짝 역광이었고 바람이 불어 내 긴 머리칼이 흩날리는 모습이었다. 한 순간이 영원이 되었다. 그 흑백사진을 참 좋아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아마 아직도 대구 집 어느 앨범에서 누렇게 변색되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30년 전 쯤 K가 현대문학에 근무할 때, 말죽거리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어긋나서 못 만났다. 그와의 통화는 그게 다였다. 그 통화도 그가 나를 찾아내어 전화를 한 거였다. 나는 그 때 이미 중앙문단에 등단을 했었고, 그는 나보다 삼 년 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K에 대해 아는 건 그게 다였다. 그에 대한 기억이란 늘 술에 취해 있었고, 늘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담배를 피우던 모습이 남아 있다. 가끔 어떤 얘기를 심각하게 하다가 히죽 웃곤 했다. 마치 이 세상 모든 일이 한갓 허망한 꿈인데 우리가 이렇게 찧고 까불고 광분하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K는 내가 가고자하는 세계에, 내가 그리워하는 세계에 이미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람 같았다.

  세월이 흘렀다. 페이스 북을 하게 되었다. 페이스북은 외로운 사람들이 찾아낸 천국이다. 사람마다 페이스 북을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말이다. 내 눈에는 그랬다. 한 밤 홀로 깨어 있을 때도 페이스북 친구들 중 누군가는 깨어 있다. 그들은 ‘모르스부호’를 허공에 날리듯 문장을 찍어 날린다. 나, 여기 살이 있어!, 하고. 온 라인 세계에 갇혀, 아니 이 망망한 우주 속에 갇혀 자신이 살아있음을 누군가에게 SOS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긴 글이나 짧은 문장으로. 혹은 ‘좋아요’로 응답한다. 

  그러다 어느 날 K가 나타났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튀어나오듯 나타났다. K가 페북을 시작한 5월 하순이었다.

  - 영희씨 오랜만... 어떻게 이곳은 세월이 거꾸로 가는지 발랄한 꽃향기 정말 좋네요.

  세상에 K가 살아 있었다. 그즈음 내 페북에는 난꽃이 만발한 사진을 몇 점 올렸었다.

  - 참 나, 도대체 뭡니까? 어느 돌 밑에 숨어 있다 나타난 겁니까? 살아는 있었군요.

  - 나는 좀 긴 꿈을 꾸고 깨었다 싶은데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이젠 좀 다르게 부지런히 살아보려고...

  36년 만에 주고받은 대화다. 이번에도 그가 나를 찾아냈다. 나는 K에 대해 몇 컷의 이미지로만 기억할 뿐, 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페북에 올라오는 글들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손톱만큼씩 알게 되었다. 그러나 K는 은근히 ‘스토커’처럼 내 소설책들을 챙겨보고 있다고 했다. 무섭다고 해야 하나, 고맙다고 해야 하나.

  중학교 일학년 때 K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의 눈에 비친 짧았던 아버지의 삶은 ‘바람이요 구름’이었다. 늘 어디론가 떠돌아다녔고, 언제나 떠나갈 채비를 하는 손님 같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전쟁 중에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K의 아버지는 얼마 전 국방부에서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의 대상자가 되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며 훈장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렸다.

  난 그 글을 읽으며 그 무공훈장이 아버지의 부재로 자란 K의 청소년기와 맞바꾼 대가구나 싶었다. K의 아버지는 이기와 탐욕과 투쟁으로 가득한 세상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외롭게 자란 K는 고등학교 때부터 술을 마셨다고 했다. 8월 15일 새벽 3시 22분에 올린 그의 시 한편이 K를 아는데 도움이 되었다. 

  장마가 시작되면

  입원하셔야죠

  의사는 내 병상을

  비워 두겠단다

  술 끊었다니까요

  나는 쓸쓸하게 웃는다

         -강석하의 시 ‘아직도 비가 내리면’ 중에서 

  K는 15년 전 급성 알코올중독 발작으로 입원했다. 대부분 환자들이 겪는 섬망증과 함께 수시로 죽은 이들이 말을 걸고 그의 방에서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그는 자의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는 폐쇄병동에서 수감자처럼 생활했다. 입원과 퇴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단다. 그러나 지금은 13년 째 단주 중이라고 시 아래 긴 주석을 달았다. 좋아요 254개. 댓글139개.

  - 강석하씨! 이렇게 부르고나니 더욱 아득하네요. 그대를 만난 지도 40년. 아득한 세월이군요. 못 본지는 36년. 어느 돌 밑에 숨었다 나왔냐고 했더니, 잠시 긴 꿈을 꾸고 나왔다고 했던가요?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걸 환영합니다.

  나도 댓글을 달았다.

  - 글쎄요... 후유증이 너무 커서 아직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내가 영희씨 앞에 모습 보인다면 그때는 그리 생각해도 될 테지요.

  K의 답글이다.

  K에 대해 다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매일 한 편씩의 시(詩)를 올렸다. 그동안의 시들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아내는 오래전에 떠나갔고, 노모와 단 둘이 살며, 미국에 예쁜 손녀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외로움이 시 전편에 깔려 있어 매일 매일 올리는 시가 절창이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아득하여 가슴이 아리다. 그냥 시가 너무 좋다, 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이렇게 바람에도 베일 듯이 여린 영혼의 소유자를 마주하면, 너무 더럽혀진 듯한 내 영혼이 보여 울고 싶어진다.

  예술가는 고독해질 권리가 있다. 그나마 의무가 아니니 다행 아닌가. ‘작가는 영원히 자신의 섬에 유배당한 자’, 이다. 그 말이 K에게만큼 잘 맞아 떨어지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건강이 안 좋아 페북을 쉬라고 의사가 처방을 내린 적이 있다. 그러다 얼마 안지나 K는 다시 매일 시 한 편씩을 올렸다.   

  외로우니 참 좋다

  찾아갈 이도

  찾아올 이도 없이

  내 그림자 벗 삼아

  묵묵히 선문답 주고받는

  일요일 오후의

  나른한 하품

  산수화의 여백 같은 삶이다

              -강석하의 시 ‘행복’ 전문  

  그의 시를 보는 즐거움과 동시에 촛불처럼 그의 생이 조금씩 타들어가고 있는듯해, 나는 한동안 그의 시를 읽지 못했다. 어쩜 이 생에서 그를 보지 못하고 지나갈 지도 모른다.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두 행성처럼 말이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나이가 들었을지 궁금하지 않다. 그의 시가, 그의 소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언젠가 페북에서, 영희씨에게 술빚이 많은데 언제 갚을지 모르겠다고 하길래, 술은 영원히 내가 살테니 아프지만 마시라고 댓글을 남겼다. 나는 그 때만 해도 그가 몹시 아픈 줄 알았다. 아, 나야 말로 말빚을 지고 말았다. 술은 ‘평생’ 내가 살게요, 라고 했어야 하는데. 술은 ‘영원히’ 내가 살게요, 라고 한 것이다.

  K와의 환생주기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백년 혹은 천년 후 다시 만난다면, 나는 술을 사야한다. 어쩜 이미 알 수 없는 생에서, 내가 K에게 한 말빚을 이 생(生)에서 조금 갚은 건지도 모른다.

  K는 피안을 그리워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는 이미 피안의 세계에 들앉아 있는 것 같다. 혹은 적어도 지금, 여기는 아닌 어떤 공간에 말이다.

  이십대 초반, 청춘의 푸른 꿈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꾸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내 생에 K는 귀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건필하길 신(神)에게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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