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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a Dec 27. 2021

'며느라기'를 추천하는 남자과 결혼을 했다

'며느라기' 터널을 지나는 법

'며느라기' 
사춘기처럼 며느리 시기를 보내는 사람.
시댁에서 인정받기 위해 무리하는 기간? 
며느리+기(기간)? 


남편이 나에게 이 인스타툰을  보라며 권해줬다.

다름 아닌 '며느라기'였다. 


인스타툰에서 먼저 시작해 출간과 지금은 드라마도 나온 이 웹툰은 평범한 며느리 민사린의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단숨에 읽어간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나'를 발견했다. 

우리는 그때 결혼 준비를 셀프로 시작해 이제 결혼을 막 한 참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나의 이야기도 있었다.


며느라기 2화 중에서  출처: 며느라기 카카오페이지 무료화

나도 결혼하고 시댁에 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우리 남편이 어릴 때부터 인기가 많았다는 모르는 여자애 얘기를 잔뜩 들었다. 그때의 나도 웹툰의 주인공처럼 그냥 듣고 있었다. 


다만, 웹툰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남편은 들어가 자지 않고,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는 점이다. 

시어머니들은 며느리에게 우리 아들이 얼마나 잘랐는지 얼마나 귀여웠는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늘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다른 화에서도 내가 시댁에 갔을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너랑 나랑 한 개씩 먹어치우자" 



시댁 식구들은 과일을 잘 안 먹는다. 시어머니 빼고. 그러다 보니, 과일을 먹고 싶어도 잘 못 산다는 시어머니의 말을 기억했던 나는 시댁을 갈 때마다 과일을 일부러 사가고는 한다. (반대로 친정에는 늘 과일이 있어야 했다) 심지어 시아버지는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어서 안 먹는 음식이다. 그래서 시댁에서 과일을 하나 깎아 먹다 보면 결국에는 남게 되는데, 어머님도 나에게 먹어치우자고 말을 한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다면, 시어머니가 억지로 먹으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편 찬스나 시동생 찬스가 사용된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안다


나는 결혼을 하기 전, 남편으로부터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로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시집살이도 당해본 사람이 시킨다"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어 한참을 두려움에 떨어야 했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어머님들 한복으로 진통이 몇 번 있었고, 나는 그것으로 마음 앓이를 몇 번 한 경험으로 결혼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옆에서 뜯어말리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남편은 나에게 '며느라기' 웹툰을 추천해 주었다. 

우리는 며느라기에 나오는 상황을 우리와 대조해보며, 남편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시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시키지도 않은 안부전화를 하고, 사진을 보내고 애교를 부리려고 애를 썼다. 아들이 없어서 딸 같은 며느리를 원한다는 시어머니의 말에 나는 '딸 같은 며느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나에게도 '며느라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어있는 남편과 배려있는 시부모님의 성품으로 나는 시댁을 좋아하게 되었다.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따랐다. 

시어머니 생신에 생신상을 차리기 위해 꽃을 사들고 가는 민사린. 출처: 카카오페이지 며느라기 무료툰  


세상에 딸 같은 며느리는 없다


그리고 결혼 5년 차가 넘자, 이제 슬슬 본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친정집에 연락을 많이 하지 않는다. 부모님 또한 공사다망하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생각하시는 분들이었다.  일주일에 두번씩 하던 연락은 많이 줄어들게 되었따. 


물론, 처음에는 우리 집과 다른 분위기에 적응하느라 시댁만 갔다 오는 길이면 몸의 긴장 때문에 몸살이 왔다. 신체적으로도 마음적으로도 긴장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던 날, 시아버지는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 나와는 말을 섞지 않던 시동생도 이제 제법 나와 말을 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 많이 시댁이 편해졌다. 혹여는 시댁이 편해지는 며느리가 어디 있겠냐며 혼날 말이라고 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어머님은 본인이 당했던 시집살이를 나에게 시키지 않기 위해 배려해주셨고, 나는 그 배려와 이해해주심에 감사해하고 존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정과 시댁의 반응은 다른때에 마주치고는 했다. 

명절에도 친정에서는 "오지 마라" 라며, 코로나니 집에서 쉬라고 말을 했고, 

시댁에서는 남편이 "코로나인데 안 가면 안 될까?"라고 시어머니에게 말했다가 "왜 아예 영영 오지 말지!"라고 혼쭐이 났다. 


세상에는 딸 같은 며느리는 없다.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 아니야 


내가 며느라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공이 컸다. 

나는 결혼을 하는 친구들에게 '며느라기'를 추천했고, 그녀들은 많은 공감을 했다. (코로나 시국에도 코로나고 나발이고 얼굴은 보고 살아야지 라는 시부모님들도 생각보다 많다. 아직도 친척들이 모이는 명절을 보내는 친구들도 생각보다 많다)


그중에서도 며느라기를 남편이 알려주고 추천해주었다는 말에 그녀들은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대게는 남편들의 반응은 '며느라기' 웹툰이나 '80년대생 김지영' 같은 것은 '페미니즘' 일뿐더러 심하게 '과장' 되어있으며, 너무 남녀차별을 조장한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친구의 남편도 그런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역으로 '남자'들이 차별당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항변을 하기까지 했다고 했다. '우리 집' 은 그럴 리가 없고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를 연신 외쳤지만, 애석하게도 첫 명절에 친구는 들이닥치는 손님들을 받느라 하루 종일 엉덩이를 붙이고 밥을 먹을 시간도 없이 밥상과 술상을 번갈아 내면서 부엌에 붙어있었다고 했다. 


친구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래도 진짜 며느라기가 없어?" 


라는 말에 친구 남편은 입을 다물었다고 했다. 


그런데 더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그 후의 반응이었다. 그다음에 시댁을 방문하여 손님을 받고 있는데, 이번에는 친구 남편이 시아버지 옆에서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면서 


"우리 부인 무서운데~가면서 또 혼날 것 같은데~" 


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에 시아버지는 마음이 불편했는지, 큰 소리로 부엌을 향해 소리치셨다.


"나는 결혼해서 한 번도 마누라를 무서워해 본 적이 없다! 술이나 더 가져와!"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친구는 남편에게 '며느라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며느라기 터널 통과 법


깨어있는 우리 남편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 친구들 사이에서 "깨어있는 사람" "세상에 없는 남편" 혹은 "로맨티시스트"로 통하는 우리 남편의 입에서도 "우리 엄마 그런 사람 아니야"가 나오는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남편이 추천해준 '며느라기'를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남편의 마음속의 방어벽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튀어나왔다. 


나는 허들이 높아서, 가끔 남편의 실수들도 나는 시어머니가 좋아서 그냥 넘어간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내가 어머님을 좋아해서 넘어가는 거야. 어머님 아니었으면 남편이랑 한판 했어!" 


우리는 모든 상황을 예상할 수 없었고, 아무리 잘해도 서로 섭섭한 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처가 가서 잠이나 자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 먼길을 운전해와서도 버티는 남편을 몰래 방으로 데리고 가서 일부러 재우기도 하고, 때로는 계속 시댁에서 서서 어머니 옆에서 있어야 했던 게 억울했던지 친정에서는 엄마의 주위를 돌려서 일부러 남편에게 설거지를 시키기도 했다. (아마 엄마가 봤거나 시어머니가 봤으면 난리가 났을지도)


그렇게 나는 나 스스로, 친정에서 설거지도 하는 남편과 함께 산다는 위안(?)을 받으면서 나 스스로 '며느라기'를 벗어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네 남편은 한 번도 사춘기가 없었어. 얼마나 착한데~


누구에게나 '사춘기'는 온다. 우리 시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자랑을 하셨다


"우리 애들은 착해서 사춘기가 한 번도 없었어" 


하지만, 나는 그걸 자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편은 '사춘기'가 없던 것이 아니라 힘든 엄마가 더 힘들어질까 봐 많은 것을 '참고' 살았다. 나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사춘기들은 홀로서기와 독립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모든 사춘기가 같은 형태로 오지는 않는다.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때, 나는 사실 남편은 조금 더 늦게 대학을 가고 왔다고 생각한다. 


어려서 못 놀아 본 사람들이 '늦바람'이 무서운 지 모르고 논다고 하던가. 

부모들은 자식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홀로서기와 독립을 하려는 자식들이 섭섭하고 갑자기 변했다고 느껴지곤 한다. 


나는 고등학교 때 사춘기가 왔었다. 

요즘 아이들은 빠른 아이들은 초등학생 때도 사춘기가 온다고 한다. 

하지만, 이르고 늦은 때가 꼭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모든 집의 분위기가 같지 않은 것처럼, 같은 집에서 태어나도 형제들마다 성격이 다른 것처럼 모두 다른 사춘기를 앓고 있다. 


사춘기의 한은 마흔까지 간다!


오은영 박사가 썼던 책에 쓰여있던 문구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오춘기, 십 춘기를, 그리고 며느라기를 겪고 있다. 

지나갈 사춘기의 터널을 통과할 때 한을 남기지 않도록, 사춘기도 잘 타일러 보자. (한이 남지 않도록)


나의 사춘기, 오춘기가 힘든 이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며느라기를 지나고 있을 이들에게.

너무 잘하려고 애쓰고 있는 이들에게도 전하고 싶다. 


"잘하고 있다."라고

사춘기 터널 끝에는 또 다른 시작점이 있으니 한을 남기지 말자고.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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