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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a Jul 06. 2021

문예창작학과 졸업하면 뭐해?

문송, 아니 문창합니다. 문창과를 나왔습니다

문창과 나오면 무슨 일 하나요?


이 질문을 하는 사람은 사실 문창과 생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나는 졸업할 때쯤이 어서야 그것이 궁금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금기어와 같았던 '돈' 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선배들과 동기들은 다 다른 분야로 취직을 하러 갔다. 


누군가의 게임 시나리오 작가로, 누군가는 광고 카피라이터로, 누군가는 신문기자로, 누군가는 잡지 에디터로, 누군가는 방송작가로, 각자의 길을 나아갔다.  종종 학원 강사를 하거나, 회사의 CEO가 되거나, 비서가 되거나 종잡을 수 없는 분야로 많이 뻗어갔다. 남의 글을 교정 교열하거나 편집을 하면서 본인의 글을 쓰기도 하고, 방송작가가 되어서 근속연수를 채워가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출판사와 방송국이 제일 비율이 높긴 했다. 


문창과를 나오면 딱 어딘가에 취직한다는 법칙은 없었다. 조교가 전화가 와서 취업현황을 묻는 대답 중에 "정규직" 보다 "비정규직"에 대답하는 비율이 더 높았다. 


기업을 가는 사람들보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각자도생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에 다닐 때도 생각해보면, 혼자 여행을 다니는 선배들이 많았다. 혼자 야간 산행을 하거나 혼자 인도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스스로의 탐구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누구에 대한 관심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관심들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과였다. 


3학년 1년 휴학을 한번 한 후, 공공기관에서 알바를 하면서 사무직 생활에 맛을 본 나는 학년이 되면서 나는 대외활동란을 채우기 위해서 돌아다녔다. 학교 후배가 

"선배는 학교에서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 "학교 밖 사람들이랑 더 친한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곤 했다. 


우연히 넣은 지원서가 붙으면서 나는 마지막 방학을 하기 전에 공공기관 인턴으로 들어갔다. 동기들 중에 제일 먼저 취직이 되어버렸다. 동기 중 어떤 이는 게임회사에 시나리오 작가로 들어갔다. 게임 시장이 이제 막 형성되던 때였다. 다른 동기들이 방송국으로 들어갔다. 학번은 다르지만 함께 학교를 다닌 선배는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우리가 글이 뻔하다면서 알량하게 여긴 사람이 제일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 제일 글빨이 좋았던 친구가 남편도 아닌 남자 친구의 집에서 주부생활로 들어앉았다. 


누군가는 글을 더 쓰고 싶다면서, 대학원을 갔다. 그중에는 학교에 다니면서 등단을 한 동기도 있었고, 등단과는 거리가 먼 동기도 있었다. S대 공대에서 다시 문창과로 입학했던 동기는 졸업 후 다시 S대로 돌아갔다. S대 대학원에서 같은 학교 학생들을 우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학교가 없었던 것인지 우리 때는 "면접스터디"라는 것은 없었다. 어디서 그렇게 알아서들 잘 살았다. 혹은 잘 사나 보다 하고 지냈는지도. 그저 문창과를 졸업하면 "작가"가 되어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문창과를 졸업한다고 해서 '문헌정보학과'처럼 '2급 정사서' 자격증을 얻는 것도 '등단'의 준우승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남들보다 더 뒷선에서 취업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면접장에 가면 문창과라고 하면 꼭 2가지 종류의 말을 들었다.

하나는 "문창과 나왔으면 글 잘 쓰겠네. 좋아하는 글 읊어봐요"와 "문창과 나오면 다들 어디로 취직하나?" 


나에게 이 말은 문창과 나와서 왜 우리 회사에 지원했냐는 말같이 들리기도 했다. 

혹여는 대놓고 "문창과 나오면 출판사 가는 거 아닌가?"라는 얘기도 했다. 그 말을 한 곳은 간행물을 찍는 잡지사였다. 


간혹 면접에서 받는 질문 중에 "좋아하는 글"을 말해보라던가. "좋아하는 작가"를 말해보라고 하는 것에 정해진 답은 없었다. 하지만, 면접장에서 면접진행하는 사람이 아는 작가가 나오지 않으면 분위기는 금세 불편해졌다. "문창과생이 누구도 몰라요?" 라는 불편한 핀잔으로도 이어졌다. 


미대라도 나오고 사진과라도 되면 포트폴리오를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문창과도 글들을 포트폴리오로 들고 다니거나 포토폴리오로 미리 보내라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면접만 보거나 혹은 자소서에 쓴 글들과 기획들이 차용되기만 할 뿐 합격자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아마도, 나의 첫 직장은 공공기관 인턴이었을지도. 

이 쓸모없는 듯한 경력이 나중에는 결국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는 나는 1도 알 수 없었다. 


첫 직장이라고 해야 할지. 첫 회사는 공공기관이었다. 

"첫 직장이 중요하다"라고 할 때 콧웃음 친 나에게 닥칠 일은 예상하지 못했다. 

더욱, '작가' 가 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대비가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내가 '문창과'를 간다고 했을때 

"왜 그런 돈도 안되는 과를 가냐"고 했을때만큼은 이런일을 예견했어야 했나? 




글을 올리는 곳에 문창과를 나왔다고 말하는 것만큼 부담스러운 일도 없지만,

문창과 안나오고도 글빨 살아 있는 분들이 많은 이 곳에서. 

문창과를 꿈꾸고, 지망하는 분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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