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로 일하는 법 (2)
영화에 대해서 자세히 몰랐었기도 했고, 영화 감독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 못했어서 나는 섭외전화가 더 수월했다.
지금은 이름을 날리는 감독님들이나 배우분들과 전화한번이라도, 인터뷰 한번이라도 해보는 것이 꿈인 영화학도들에게는 꿈같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녹화가 있는 날은 아침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굶느라 입에서 단내가 났지만, 특히 MC로 나왔던 변감독님의 말빨이나, 김감독님이 해외 촬영 후 사다준 '걱정인형' 이 기억에 많이 남아서, '감독'이라는 직업이 참 세세한 감정들을 캐치해내야 할 수 있는 일이구나를 느끼게 해주었다. 잠깐동안의 인터뷰로도 알 수 있었던 최감독의 카리스마도 오래 기억에 남았었다. (후에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 감독일줄은)
갑자기 프로그램이 폐지가 되면서 나는 '강제 백수' 신세가 다시 된다는 사실에 긴장했다. IMF시절 직장을 잃었던 많은 사람들이 겪었을 불안감에 비할것은 못되지만, 나는 지속적으로 매달 나가야하는 월세와 학자금대출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고정지출이 있는데, 고정수입이 없는 삶이라는 것은 굉장히 불안했다. 나는 불이나케 다른 프로그램을 알아보았고, 흔히들 방송작가들의 입문 사이트에서 구직을 하기가 힘들다. 인맥이나 연줄로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출신이라면 더욱 연줄을 만들기 쉽지만, 아카데미 또한 수강료도 만만치 않다.
연줄이 없거나 아카데미 출신이 아닐때
방송작가 구인구직란을 제일 많이 보는 사이트
*미디어잡 (작가 외에 총괄적으로 올라옴)
*KBS구성다큐연구회 ,KBS구성작가협의회
*MBC구성작가협의회
*방송작가협회 교육원
나 또한 그런 케이스였다. 나의 기준선은 2가지였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언니들의 인맥을 따라 다른 자리로 가볼껄 그랬나 싶기도 하다. 왜 경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사이트에 있는 일자리로 찾아갔는지 모를 일이다.
1. 본사 프로그램으로 본사에서 일하는 자리.
2. 지금보다 더 많이 주는 자리.
아무래도 시작한 프로그램의 방송국의 본사 자리로 면접을 보고 일을 시작하였다. 나는 무리하게 본사의 다큐 프로그램에 들어가게되었다. 이름이 나있는 간판 프로그램이었는데, 팀이 12개~많게는 14개까지 돌아간다고 했다.
그 팀들은 주제별로 구성 팀원 수가 달랐는데, 내가 속한 팀은 작은 편에 속해 PD한명과 작가 한명, 그리고 간혹 촬영 알바가 붙었다. 나는 메인작가 밑에 막내 작가였다. 나의 페이는 그전보다 조금 오른 딱 100만원이었다.
메인작가는 첫날 나에게 밥을 먹으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피디들에게 밀리면 안돼. 니가 밀리면 작가들이 다 밀리는거야. 절대 밀리면 안돼"
라고 다짐을 받아냈다. 피디들에게 무시받은적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했다. 자꾸 자기들 마음대로 한다고 했다. 방송가에서는 은연중에 작가와 피디와의 눈치 싸움이 줄다리기 하는 경우가 많았다.
꾸역꾸역 방송국앞 돈까스 집에서 입에 돈까스를 집어 넣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메인작가는 거의 출근을 하지 않았다. 촬영날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너 남자친구 있니?"
"네"
"당장 헤어져. 어짜피 헤어지게 될거야"
내가 남자친구가 있음이 공개되자마자 그녀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방송가에서는 특별할 것도 없다는 것이 놀라운 점이었다.
메인작가는 30대 후반이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았고 연애도 하지않는 본인입으로 명명한 '워커홀릭'이었다. 그녀는 일본에서의 여행을 묶어서 책으로 내려고 준비중이라고 했다. 낮에는 자신의 일을 하고, 특별히 밤과 주말에 일을 많이 시켰다. 대중없이 갑자기 일을 시키거나 출근시간이 정해져있는 내가 출근시간이 무색하게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일을 시키거나 공휴일에 일을 시켰다. 그렇다고 밤새 자료를 찾았다고 9시 출근을 안할수는 없었다. 자신이 출근하지 않는대신 내가 사무실에 자리를 지키고 있기를 바랐다.
자료를 찾는 일은 대부분 국회도서관에서 자료를 복사해와야했다. (국회도서관은 관내 대여만 가능하며, 관외 대여가 불가능한 자료가 많다. 심지어 빌려볼 책도 카운터에서 신청을 해야 받아볼 수 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집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타러 가는 길에 다시 돌아오거나 약속을 정해놓고 다시 취소 하는 일이 잦아졌다. 자료를 찾아달라고 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신경질을 받아내야하는 날이 늘어났다.
장마가 끝날 무렵, 촬영을 가는 날 나는 장마소식에 장화를 신고 촬영장에 갔다. 하지만, 그날따라 장마가 그쳐 햇빛이 쨍쨍내렸고, 장화를 신고 산 중턱에 있는 마을을 쏘다니느라 땀에 쩔어갔다. 촬영은 땅거미가 질때까지 계속 되었다. 내가 하던 다큐는 '범죄예방설계'에 관련된 것이었다. 촬영감독과 피디는 여자 발걸음을 따야한다며 나에게 왔다갔다를 시켰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한건 빨간 하이힐을 신은 여자였다. 나에게 왜 "여자가 장화를 신고 왔냐"고 다그쳤다. 마음에도 소금이 맺혔다. (그들에게 소금을 팍팍 뿌려줄껄)
그래도 다큐 준비를 하면서 경찰대 교수님들을 인터뷰하고 범죄심리학 교수님들을 만나면서 공부가 많이 되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에 대해서도, CCTV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방송작가를 시작한 후 본가에 내려간적이 없었다. 왜 방송일을 하면 방송국놈들과 연애를 하는지 알 수 밖에 없었다.
남들이 일할때 쉬고 남들이 쉴때 일하는 삶은 결코 평범하지도 쉽지도 않았다
친구들과의 교류가 끊어지고, 생활리듬은 깨지고 나는 나의 건강과 젊음을 갈아서 일에 집어넣고 있었다.
수십개월의 노고가 1시간도 되지 않는 방송으로 보상되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 달리는 것인데, 어쩐지 기쁘지가 않았다.
겨우, 나는 아빠의 생일에 맞춰서 하루 휴가를 받아놓고, 크리스마스도 반납한채 나를 갈아넣으며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방송가에서 일하고 있는 후배들의 피디 남친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방송가 일을 하다보면,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는 일들이 많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있었다.
방송일을 하다보면, 크리스마스가, 생일이, 공휴일이 중요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조그마한 회사라도 자리를 잡고 경력을 쌓으며 '대리'를 달았다고 축하파티를 했다.
나는 그 어느누구와의 약속 자리에도 갈 수 없었다. 나 대신의 술자리, 약속자리, 축하 자리가 이어졌다.
밝아오는 해의 기운에 꺼져가는 성탄불빛들과 이제 철이 지나버린 성탄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퇴근하는 지하철 첫차에 앉아 한강을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의 약속은 '크리스마스의 악당 그린치'가 훔쳐갔다.
결국 그녀의 예언대로 남친과는 이별을 했다.
누군가가 흘리고 간 성탄모자가 발밑에 밟혔다.
나도 언젠가는 메인작가가 될것이고, 프로그램을 이끌어갈 꿈을 꾸었었다.
그것이 내가 꿈꾸던 크리스마스의 선물이었을것이다.
이제 아이들은 잠에서 깨면,
걸어놓은 양말에 들어있지 않은 선물의 존재에 실망하고,
산타의 존재를 부정하며 분노할 것이다.
그런데, 내 폰을 울리는 그녀의 분노는 무엇때문일까.
"너를 작가 명에서 빼버릴꺼야. 미친X. 남친이랑 X 치느라 내가 시킨거를 안하는거야?"
크리스마스날 밤을 새고 만나는 문자는 가혹했다.
나의 20대 마지막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작가'의 삶이 이런것인가 생각해보았다.
나도 이제, 이 잠에서 깨야할 때이다.
황망하게 비어버린 양말을, 산타의 부재를 마주할 때 였다.
"저 그만둘게요."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이.
지금까지 다 준비해서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방송을 할 수 있는데.
또 다시 백수로의 삶으로 추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