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La Oct 19. 2021

가족이지만, 알아가는 중입니다

가족도 시간이 필요해 

나는 아빠와 스무 살이  넘어서야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딱히 가족 간에 사이가 나빠서도 아니었고 가세가 기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 아빠는 무뚝뚝하고 조용한 경상도 남자였다. 


경상도 남자에게 '치밥'이란?


우리 아빠에게 치밥이란 치킨에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치킨을 다 먹었으니 이제 밥을 먹어보자.이다. 엄마는 이걸 참 싫어했다. 치킨을 저녁으로 하고 싶은데 아빠는 꼭 밥을 따로 먹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치킨만 먹을 때는 밥도 안 준다면서 투덜거렸다. 밥을 꼭 엄마가 차려줘야 먹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아빠는 나를 딱히 혼낸 적도 없다. 그렇다고 어떤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아빠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못마땅해한다고 생각하거나 별로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경상도 남자인 아빠가 이렇다 하게 표현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들 타령을 하시던 할머니의 영향도 있었다. 


나는 아들 없는 집의 맏딸로 흔히 '열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나의 노력은 고등학교 진학하면서 놓게 되었다. (아들 막둥이가 태어났다)


아빠와의 최초의 기억


내가 어렸을 때 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빠는 나를 등목을 태워서 캠핑도 다니고 등산도 하고 많이 놀러 다녔다고 한다. 나는 내가 기억나지 않는 어렸을 적이 나에게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빠와의 최초의 기억은 눈 오는 날이었다. 

눈이 잘 오지 않는 부산에서 눈은 신기한 존재였다. 겨울에도 몇 번 내리지 않던 눈이 반가워서 집 밖으로 나왔던 것 같다. 그렇게 아빠와 집 앞 나무 의자에 앉아 눈을 맞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리는 눈에 밤이었는데도 동네 아이들이 나와서 눈을 굴려가면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빠 눈사람 만들어줘" 


아빠에게 눈사람을 만들어달라고 하자 아빠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손에 가만히 받았다. 

아빠 손에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그러자 아빠는 눈을 구슬만 하게 굴려 눈 위에 조그마한 눈사람을 만들어줬다.


"자, 눈사람" 

"치, 이건 눈사람이 아니잖아"


나는 내가 생각한 커다란 눈사람이 아니라서 나는 아빠가 눈사람도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울상을 지었다. 아마도 내가 어린이집 다닐 때 유아 원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비추어 이것이 나와 아빠의  최초의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3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는 주말 부부


아빠가 일하는 곳이 집에서 멀어서 늘 주말부부였다. 지금에서야 3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는 것이 주말부부라고 하지만, 그때는 내가 아빠가 없는 것도 아닌데 아빠가 평일에 없다는 것이 많이 불편했다. 


한 번은 초등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렸는데 아빠와 함께 달리기 코너가 있었다. 나와 내 친구만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 친구는 아버지가 없다고 했다. 하늘나라에 있다고 했다. 


"너도 아빠 없어?" 

"아니 있어" 

"근데 왜 오늘 안 왔어?" 

"있는데 오늘은 없어"


그 친구가 나에게 너도 아빠가 없냐고 했다. 나는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빠가 올 수 없다는 걸 나는 어린 나이에도 알았다. 나는 내가 처음으로 불쌍했다.

 

이래나 저래나 원래 주도적인 성격인 데다가, 주말부부를 한 경상도 아빠의 영향으로, 아니 주도적으로 혼자 아이를 키워내면서 살아온 엄마의 영향으로 나는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주도적이라고 쓰고 내 마음대로라고 읽는다.)


경상도 딸이 경상도 아빠와 함께 


내가 우겨서 반수를 해 예대로 진학을 했다.

외할아버지는 "왜 돈도 안 되는 과에 가냐"라고 했다. 어른들에게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최고였다.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지" 


그래 놓고 외할아버지도 그 시절에 대학까지 나온 문과생이었다. 나는 경상도 남자인 아빠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교사가 되기를 원했다. 장래희망에 부모님들은 '교사'를 줄기차게 썼다. (그 시절엔 공무원보다 교사를 많이 희망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사대에 수시를 넣으러 가놓고도 지원서를 내지 않았다.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가기만 하면 효녀가 된다던 국립대 국어국문과에 지원한다고 하고서 서울로 예대 실기를 보러 갔다.

 

나는 아빠가 나에게 실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미안해하지 않았다. 


"너는 부모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네 마음대로 하냐" 


엄마가 나에게 나무랐지만 아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 말을 들어도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이니 내가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네 아빠가 너 대학 붙었다고 문자를 다 돌렸어


반수를 해서까지 갈 정도로 유명한 대학은 아니었다. 2년제는 안된다는 엄마의 말에 나는 4년제 예대를 (몰래) 진학했다. 


신이 나서 인천 이모집에 놀러를 왔다. 이모부가 물었다.


"아빠도 좋아하시지?"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을 했다. 


"아닐걸요?" 


이모부는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아빠가 문자를 돌렸다고 했다. 내가 대학에 붙었다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했다.

 

무뚝뚝하고 내색을 않던 아빠가 온갖 친척들에게 문자를 돌리며 기뻐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내가 아는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경상도 남자에게 경망스러운 자랑 문자는 허용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던 경상도 남자란 그런 것이었다. 


아빠는 자랑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뽐내기를 하기보다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이었고 또 말을 하기보다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빠가 온 친척들에게 문자를 돌릴 정도로 기뻐했다니. 이모부의 말 한마디로 나는 그제야 나는 눈을 가리던 장막을 걷어낸 듯 아빠의 사랑이 보였다. 온갖 친척들에게 문자를 보내며 웃음 짓는 아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렇게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된 나에게 부모님은 연신 '서울은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말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콧웃음을 치며  '혼자 살기'에 부풀어 있던 나는 보기 좋게 뒤통수를 당했다. 


아빠는 서울로 근무지 변경 신청을 했다. 힘들기로 유명한 서울 근무지로 온 것이다. 

아빠가 서울로 쫓아왔다. '쫓아왔다'는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후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서울로 오면 10년씩 늙어서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의 강도가 강했던 곳이었다. 아빠가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기까지 갑작스럽게 흰머리가 많이 생긴 것도 그때쯤인 걸로 기억한다)  


딸을 혼자 둘 수 없어서 아빠가 방을 구하고 나는 그렇게 6평 독신자 아파트에서 처음으로 아빠와 단둘이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여자 혼자는 위험해서 못 산다"


"싫어!"


엄마는 내가 서울로 가는 날 군대를 보내는 냥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그런 엄마를 위로하는 아빠의 모습을 방 밖에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흘기며, 아빠와 같이 살게 한 엄마에 대한 원망만 생각했다. 


주말에만 보던 아빠를 갑자기 한 집에서 살려니 어색하기 짝이 없고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도 경상도 아빠는 처음이라서.'

 

그런데 반대로 아빠도 '무뚝뚝한 경상도 딸은 처음이라서.' 

 

하지만, 식구는 같이 붙어살아야 한다는 말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렇게 나는 무뚝뚝한 경상도 아빠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경상도 아빠에 경상도 딸이 당연한것 같지만 동생은 우리집이 이사한 후로 충청도 아들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아빠가 야자를 하고 독서실을 갔다가 집에 오는 나를 마중나와서, 내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다음번 손잡음이 결혼식이 될줄은 나도, 아빠도 몰랐다. 


우리는 사실, 아직도 서로 알아가는 중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딸을 둔 아버지가 사돈에게 해야 할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