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가 누군지 모릅니다.
새벽 수영 일기 7
숨은 직업, 직급 찾기
자유형으로 레인을 6바퀴 돌고 와 강사님의 설명을 듣는 중이다. 한 반에 20명 내외의 강습생들이 등록을 하지만 새벽반에는 모든 강습생이 참석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날의 참여한 강습생의 수는 늘 늘었다 줄었다 하는데 오늘은 제법 많은 강습생분들이 나와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레인을 한 바퀴 돌고 오면 사람들의 눈빛이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조금 지루한 설명이라도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게 된다.
강사님의 설명이 조금 길어져서 인지 경청하고 있는 강습생들 사이에서 잡담을 하는 분들이 보였다.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남성분과 대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여성분이 자유형 할 때 이런저런 점이 힘들다며 서로 소곤대는 중이었다.
수영장은 생각보다 세대통합이 굉장히 잘 된 곳 중에 하나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함께 수영을 하기 때문인데 알 수는 없지만 나이도 제각각, 직업과 직급도 모두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레인 안에서 만큼은 모두 같은 중급반 강습생이다. 어쩌면 잡담 중인 저 남성분과 여성분은 사실 회사에서는 '부장님과 대리'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여기서야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해 주는 동지들이지만 수영장 밖에서는 직급에 맞게 대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다른 분들은 수영장 밖에서 모두 어떤 직업과 직급을 가지고 있을까?
왠지 이분은 수영장 밖을 나가면 대기업 부장님으로 출근하실 거 같고, 저분은 어쩐지 발레학원 선생님이실 거 같다. 그리고 여기 젊은 여자는 대학생이 틀림없는데 체육과 학생일 거 같았다. 그 짧은 순간 직업 맞추기 놀이로 잠깐의 딴짓을 한 뒤로는 새로 강습반에 신입생이 들어오면 나 혼자 직업 맞추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어쩌다 진짜 직업과 직급을 알게 되면 맞추는 것보다 틀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그렇게 안 생겼는데...' 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사람을 생김새로 판단하는 건 좋지 않지만 수영장에서는 수영모로 머리카락이 모두 감춰져 있고, 여성도 화장을 하지 않은 민낯의 맨 얼굴만 보고 유추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평소에 내가 가진 데이터에 의존하여 생김새와 분위기만으로 매치시키게 된다.
물론 수영복과 수영모를 보면 그 사람의 취향이 보이지만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 어떤 직함을 가지고, 얼마를 버는지는 모른다.
성수동에서 멋진 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여성을 보면 그 사람의 '부'가 보이고,
여의도 금융센터에서 양복을 입고 걸어 다니는 직장인들에게는 '위엄'이 느껴지고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의사가운만 걸쳐도 '권위'가 드러나지 않는가.
하지만 수영장에서는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누가 더 수영을 잘하는지, 누가 나보다 앞에 서야 할 분이지만 판단될 뿐이다.
그래서인지 수영장 '안'에서는 계급이 재배열 된다.
가장 먼저 레인으로 나뉘고, 그 다음은 순번으로 나뉜다.
수영장 '밖'에서의 높은 직급과 대단한 직업이 여기서는 쓸모가 없어진다.
부와 명예, 직업과 직함은 물 속까지 따라 오지 못하니 말이다.
내가 얼마만큼 하느냐에 따라 수영장에서의 계급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다.
어제 뒤에 섰던 사람이 오늘은 앞에 서기도 하고, 오늘 같은 레인이었던 사람이 다음 달에는 다른 레인으로 가기도 하니 말이다.
아무리 대단한 대표님이라고 해도 수영장에서 수영을 잘하지 못하면 모두 같은 수영 초보자인거다.
이렇게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수영장에서 재배열된 계급이 오히려 우리를 모두 평등하게 만든 기분이다. 나역시 아무런 직업도 직급도 없는 지금의 내가 전혀 작게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특히 새벽 수영반은 다들 바쁜시간을 쪼개어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누구도 섣불리 호구조사를 하지 않고, 굳이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않는다.
그저 매일 새벽 이름도, 직급도, 명함도 잠시 맡겨두고 다 같이 숨 차오르고, 서로가 서로를 응원해 주며 진짜 민낯을 공개해도 부끄럽지 않은 모두가 평등해지는 공간이다.